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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595
한자 儒敎
영어의미역 Confucianism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집필자 전병철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지역에서 행해지는 공자의 사상과 관련한 학문과 의례 및 활동 일반.

[유학자]

1. 16세기

하동군의 유학자를 출생 시기별로 살펴보면 우선 가장 앞선 시기의 인물로 지족당(知足堂) 조지서(趙之瑞)[1454~1504]를 들 수 있다. 조지서연산군(燕山君)이 세자로 있을 때 스승의 직책을 맡아 엄격하게 지도하다가 미움을 사게 되어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조지서연산군이 즉위하자 감당할 수 없을 것임을 알고 창원부사(昌原府使)의 자리를 청하여 외직으로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창원부사를 사직하고 고향인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玉宗面) 동곡(桐谷)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연산군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 조지서를 연루해 결국 참형에 처하였다. 연산군이 폐위된 후, 조지서는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맏아들 정정(鄭珵)은 군자감 참봉에 제수되었다.

16세기의 인물로는 모산(茅山) 최기필(崔琦弼)[1562~1593]과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1593~1666]를 거론할 수 있다. 겸재 하홍도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로부터 남명학을 전수받았으며, 사람들로부터 ‘남명 이후에 일컬어질 만한 오직 한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남명학파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2. 17·18세기

17세기의 인물로는 낙와(樂窩) 하홍달(河弘達)[1603~1651], 삼함재(三緘齋) 김명겸(金命兼)[1635~1689], 설창(雪牕) 하철(河澈)[1635~1704], 양정재(養正齋) 하덕망(河德望)[1664~1743], 주담(珠潭) 김성운(金聖運)[1673~1730], 한계(寒溪) 하대명(河大明)[1691~1761], 괴전와(愧全窩) 하대관(河大觀)[1698~1776] 등을 꼽을 수 있다.

낙와 하홍달겸재의 아우이며, 삼함재 김명겸겸재의 문인이다. 설창 하철낙와 하홍달의 아들이자 겸재의 조카이며, 양정재 하덕망겸재 하홍도의 아들이다. 한계 하대명하덕망의 아들이며, 괴전와 하대관겸재의 증손이다. 따라서 주담 김성운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이들이 겸재의 집안 인물로, 가학을 계승하여 남명학파의 학맥을 이어나간 유학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18세기에는 국헌(菊軒) 하달성(河達聖)[1734~1791]과 중은(重隱) 강석좌(姜錫佐)[1777~1853]가 있었는데, 이들이 활동한 시기는 인조반정으로 인해 남명학파가 큰 타격을 입어 극도의 침체를 겪은 때이다.

3. 19·20세기

19세기는 경상우도의 유학이 매우 흥성하던 시기로, 학문과 덕행을 겸비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유학자들이 대거 출현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상우도 유학의 흥성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 중에는 하동군 출신의 유학자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월촌(月村) 하달홍(河達弘)[1809~1877], 간취당(澗翠堂) 정우빈(鄭瑀贇)[1823~1892], 효재(嘐齋) 정원항(鄭元恒)[1823~1905],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1824~1904],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1837~1905], 두산(斗山) 강병주(姜柄周)[1839~1909], 월산(月山) 조성주(趙性宙)[1841~1918], 니곡(尼谷) 하응로(河應魯)[1848~1916], 해사(海史) 정돈균(鄭敦均)[1855~1941], 석전(石田) 문진호(文晉鎬)[1860~1901], 수재(守齋) 정봉기(鄭鳳基)[1861~1915], 수당(修堂) 최경병(崔瓊秉)[1865~1939], 사와(士窩) 하재도(河載圖)[1869~1931], 신암(愼庵) 최긍민(崔兢敏)[1883~1970], 청천(晴川) 정기식(鄭基軾)[1884~1958], 담헌(澹軒) 하우선(河禹善)[1894~1975]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20세기 초에 출생하여 조선 시대 유학의 끝을 장식한 인물로는 굴천(屈川) 이일해(李一海)[1905~1987]와 경재(敬齋) 김기주(金璣柱)[1907~1977] 등이 있다.

이와 같이 하동군의 유교적 전통은 조선 초기에 활동한 조지서로부터 시작되어 조선이 멸망하고 새로운 근대 국가가 건립되는 20세기 전반기에 이르기까지 유구히 이어져 내려왔다. 그리고 조선 시대 유교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들이 대거 배출되어 그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하동 지역을 중심지로 삼아 전국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소임을 감당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서당 및 서원]

서당 및 서원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 의해 건립된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강학 활동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공부 장소의 확립이다. 둘째는 훌륭한 선현에게 제사를 올려 존모의 마음을 기리고 그분들의 학문과 삶을 계승하고자 노력하는 기념 공간으로서의 의미이다. 하동 지역의 서당 및 서원도 대체적으로 이러한 연유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지역별로는 다음과 같다.

1. 옥종면

하동군 옥종면은 하동 지역에서 유학자를 가장 많이 배출했으며 서당 및 서원도 가장 많은 지역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덕원서당(德源書堂), 도천서당(道川書堂), 옥산서원(玉山書院), 종천서원(宗川書院)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종천서원은 1868년(고종 5) 훼철된 후 건물은 없어지고 서원의 현판만이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안계마을에 있는 모한재(慕寒齋)에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2. 북천면

하동군 북천면은 하동군에서 옥종면 다음으로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했으며 서당 및 서원도 두 번째로 많은 지역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신천서당(新川書堂)인천서원(仁川書院)을 들 수 있다.

3. 기타

하동군 양보면 감당리에 있던 영계서원(永溪書院)문헌공(文獻公)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을 주향으로 모시고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배향한 서원으로, 하동과 관련된 조선 시대의 관찬 또는 사적 기록에 빈번히 등장하는 중요한 곳이다. 그러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현재는 비석이나 기타 관련 유적조차 찾을 수 없는 실정이다. 이 외에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에는 공교육 기관이었던 하동향교가 있다. 또한 서당 및 서원은 아니더라도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1529~1590]을 모신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수정당(守正堂), 안계리겸재 하홍도의 강학처인 모한재 등도 하동 유교와 관련된 중요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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