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4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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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世基 |
영어음역 | Jeong Segi |
이칭/별칭 | 정명기(鄭明基)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698|금남면 송문리 520|고전면 전도리 1081-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양판석 |
출생 시기/일시 | 1894년 9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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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23일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몰년 시기/일시 | 1981년 3월 12일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698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진주시 교육위원회 부위원장 |
[정의]
일제 강점기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영일(迎日). 아버지는 정찬옥(鄭燦玉)이고, 어머니는 정진덕(鄭晋德)이다. 부인은 창녕 조씨(昌寧趙氏) 조도업(曺道業)이며, 그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1. 3·1만세운동
정세기(鄭世基)[1879~1981]는 1894년 9월 28일 출생하여, 선조인 정몽주(鄭夢周)를 모신 재각에 건립된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일신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하동에서는 3월 18일 하동읍에서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스승인 정섬기(鄭暹基)[1895~1954]의 지도 아래 정성기(鄭成基)[1886~1943], 이경호(李璟鎬)[1890~1920], 정이백(鄭移伯) 등과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태극기 10여 기를 제작하여 거사를 준비하였다.
3월 23일 하동읍 장날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800여 명의 군중과 더불어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1년여를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출옥한 뒤 배우지 않고는 나라를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진학을 결심하였다.
2. 만주에서의 활동과 청년운동
서울 중동중학교를 어렵게 다니면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고민하였다. 졸업 후 북간도로 들어가 근거지 확보를 위한 차원에서 물장수를 시작하였다. 당노동공제조합 전무인 김희정과 함께 북청 사람들의 독점과 횡포에 맞서 노동자의 권익을 지켜 내고 동족끼리의 파벌 조성을 없앴다.
또한 지역 주민과의 분쟁에서 한국인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일을 하면서 고학생들을 위한 육영 사업도 병행하였다. 1928년 10월경 귀국하여 청년회를 조직하였고, 연극단을 창설해 신파극을 통한 민중 교화를 하는 한편 창출되는 수익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왔다. 하동군 금남면에 청소년강습소를 세우고 교육받지 못한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해방 후에는 초대 진주시 교육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81년 3월 12일 별세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2년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송추 문경공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