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이상향에서 도인촌으로, 지리산 청학동의 변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797
한자 理想鄕-道人村-智異山靑鶴洞-變遷
영어의미역 From Paradise to Taoist Village, Change of Cheonghak-dong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원석

[하동의 청학동은 전통 시대 이상향의 원형]

사람은 누구나 이상적인 장소를 희구하며 살고자 한다. “낙토(樂土)에서, 낙토에서 이제 나는 살고 싶네…… 낙국(樂國)에서, 낙국에서 이제 나는 살고 싶네.”라는 민초들의 간절한 소망이 이미 중국의 옛 고전인 『시경(詩經)』에 담겨 있듯이, 이상향을 바라는 인간의 염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이상향에 관한 다양한 장소 관념과 실천 태도를 낳았다.

흔히 중국의 이상향이라 하면 무릉도원을 떠올리는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청학동은 전통 시대 이상향의 원형이었다. 우리 민족이 꿈꾸었던 이상향은 청학동 외에도 우복동[경상북도 상주와 충청북도 청주·보은 접경지], 용화동[경상북도 상주], 이화동[금강산], 산도동[관동], 태평동[함경북도], 오복동[경상도], 회산동[평안도], 식장산[충청도] 등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하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청학동은 전통 시대 사람들이 소망하고 추구했던 한국적 이상향의 전형이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1788~?]은 「청학동 변증설」에서, “청학동은 동방의 한 작은 골짜기에 불과하지만 천하에 유명하였다. 우리나라에 비경으로 이름난 곳이 매우 많지만 청학동이 유독 세상에 이름났다.”고 했고, “청학동은 조선조에 이르러 온 세상에 회자되어 모르는 사람이 없고 가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도 하였다.

[역사 속의 청학동은 어디였고, 어떤 곳이었을까?]

역사 속의 청학동지리산 어디쯤에 있었을까? 지리산 청학동은 어떤 곳이었을까? 역사 속에서 청학동을 살펴보면 흥미롭게도 청학동의 위치와 장소, 성격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천했음을 알 수 있다. 청학동은 고려 후기 이후 유학자들의 상징 공간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민간인들의 생활공간이었으며, 현대로 들어와서는 관광지이자 문화 공간으로 변모했다.

하동의 불일폭포불일암 부근은 늦어도 고려 후기 전후부터 청학동으로 비정되었는데, 이곳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유학자들에게 선경(仙境)이자 이상향의 상징적인 장소로 고정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원 청학동 인근의 의신, 덕평, 세석, 묵계 등지에 민간인들이 취락을 이루어 청학동의 이상을 기대하고 또 실현하고자 하였다. 현대에 와서 청학동은 관 주도로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에 재구성되었고, 청학동의 장소 이미지를 활용한 장소 마케팅의 관광지로서 개발되고 있다.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신선의 땅, 청학동]

신선경으로서 청학동이라는 장소의 정체성이 생성되고 유지되는 시기는, 늦어도 고려 후기에 시작되어 조선 시대를 거쳐 근대까지 이어져 왔다. 청학동의 지리적 위치는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악양면 매계리에 걸쳐 있었다.

정치적 현실과 유가적 이상의 괴리로 고민하던 조선조 유학 지식인들에게 지리산 청학동은 가장 매력적인 장소였다. 당시 지리산 청학동은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가상적인 상상의 장소였지만, 불일폭포를 중심으로 한 비경은 지리산을 탐방하는 사람들에게 신선경으로서의 황홀한 미감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시대의 많은 시문과 유산기(遊山記)에서 청학동의 장소 이미지는 별유천지(別有天地)의 선경으로 신비롭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장소 이미지는 신선과 관련한 설화 내지는 인물이 부가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청학동이 구체적으로 등장한 최초의 문헌은 고려 후기 문신 이인로(李仁老)[1152~1220]의 『파한집(破閑集)』이다. 그는 청학동을 탐방하다가 만난 지리산 인근 마을 노인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지리산 청학동을 언급하였다. 이인로청학동을 찾았던 이유는 “이 속세를 떠나 길이 숨을 뜻이 있어서 청학동을 찾는다.”고 술회하는 심정에 잘 나타나듯이, 고려 후기의 혼란한 사회에서 은일, 은거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함이었다. 조선 전기에 김종직(金宗直)[1431~1492]을 안내한 승려 혜공도 악양현 북쪽 골짜기를 청학동이라고 가리키면서 ‘신선의 지역’이라고 일컬었다.

허목(許穆)[1595~1682]은 신선의 산인 지리산에서 가장 기이한 장소가 청학동이라고 하면서 “남방의 산 중에서 지리산이 가장 깊숙하고 그윽하여 신산(神山)이라 부른다. 그윽한 바위와 뛰어난 경치는 거의 헤아릴 수 없는데 그중에서도 청학동이 기이하다고 일컫는다. 이것은 예부터 기록된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여러 유학자들이 시문(詩文)에서 묘사한 승경(勝景)으로서의 장소 정체성은 신선과 관련한 설화가 덧붙여지고, 역사적 인물인 최치원(崔致遠)[857~?]을 청학동의 장소적 이미지를 상징하는 인물로 부각하면서 더욱 강화되기에 이른다. 청학동 지역에서는 최치원청학동의 살아 있는 이인(異人)으로 믿거나, 가야산과 지리산을 오가는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설화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던 것이다.

또한 청학동과 관련한 이야기 중에는, 조선 중종 때 남주(南趎)가 하인을 시켜 청학동을 찾아가 신선의 바둑돌을 얻어 왔다는 선계 설화(仙界 說話)도 있고, 백구룡의 제자가 지리산 청학동에 가서 최치원과 은단대사가 바둑 두는 것을 보고 내려오니 여섯 달이 지났다는 내용도 있다.

『계서야담(溪西野談)』의 「김진토기(金進土騎)」에는 “어느 날 김생에게 건장한 사내가 백마를 끌고 와서 타라고 권하므로 산 속으로 들어가니 그곳은 청학동이었다. 그곳의 백발 늙은 신선으로부터 도술을 공부하여 득도하였다.”는 내용의 설화가 전해진다.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청학동에 들어가서 최고운을 찾다」는 시에서는 최치원청학동과 결부시키며 선경으로서의 장소 이미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고운천재인(孤雲千載人)[고운[최치원]은 천 년 전 사람]

연형이기학(鍊形已騎鶴)[수련을 쌓아 학을 타고 다녔지]

쌍계공구적(雙溪空舊蹟)[쌍계에는 옛 자취만 허전하고]

백운미동학(白雲迷洞壑)[흰 구름 골짜기에 아득하여라][이하 생략]

[민중의 삶터 명당, 길지의 땅, 청학동]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 이후 정치적·사회적 혼란이 지속되면서 생활이 피폐해지자 사람들이 지리산 골짜기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18세기 무신란[1728] 이후로 지리산 골짜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피난하여 거주하였다. 지리산 유민들이 주거지를 선택하고 정착하는 데는 지리산 청학동에 관해 일찍부터 퍼져 있었던 소문과 장소 이미지가 강력한 매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때맞춰 일기 시작한 풍수 도참 비결의 유행과 『정감록(鄭鑑錄)』 비결을 신봉하는 자들의 십승지(十勝地) 탐색은 청학동을 명당 혹은 길지라는 이미지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명당, 길지로서의 청학동이라는 장소 정체성은 조선 후기를 거쳐 현재 살고 있는 일부 주민들에게까지 유지·존속되고 있다.

지리산 청학동에 관한 비결서들의 내용을 보면, 기존에 신선경으로 기록되었던 유산기나 시문류와는 다르게 청학동의 장소적 성격이 표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결서에서 청학동은 ‘마을’로서 문화 경관의 형태와 기능이 규정되었다. 이를 보면 청학동의 취락 규모에 관해서는 “천여 호나 거주할 만하다.”거나, “10년 안에 백여 호에 이르는 촌락을 이룬다.”고 표현했으며, 이상적인 기후와 지형 및 토양 등 생산성 있는 토지 조건과 규모를 갖추고 있어서 농경에 좋은 조건을 갖춘 장소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비결서에 지리산 청학동은 “지대가 높아도 서리와 낙엽이 가장 늦게 오는 곳”으로 기후 조건이 좋고, “한 되를 파종하면 한 섬의 소출이 나는” 땅으로 토지 생산성이 탁월하며, “천 석의 논농사를 지을 수 있고 흉년이 들지 않는” 이상적인 농경의 생산 규모와 조건을 갖추고 있는 장소로 소개되고 있다. 또한 청학동은 풍수가 좋은 터전으로서 “영남의 명승지” 혹은 “조선 명기(名基)”의 풍수적인 명당 길지로 장소성이 묘사되었다. 그리고 전쟁의 재난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 보신의 땅[避難保身之地]으로 “병화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는 조건도 표현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리산 청학동에 이르는 구체적인 지리적 도로 및 위치 정보도 비교적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지리산에서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던 청학동은 기록에 남아 있는 것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문헌이나 현지답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곳으로는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의신마을과 덕평마을, 세석평전, 악양면 매계리 매계마을과 청학골 등을 꼽을 수 있다. 송병선(宋秉璿)은 1879년에 쓴 「두류산기」에서 대성리 의신마을과 덕평마을을 포함하는 지리산 골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화개동 북쪽에서 벽소령 아래의 40~50리는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으며,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여 풍기가 온화하고 토양은 비옥하며 물은 풍부하고 곡식과 과일이 갖춰 있으며 연초가 많이 생산되는, 최고의 낙토로서만 사람이 생활할 수 있고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다.”

[묵계 청학동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20세기 후반 주민들의 독특한 생활양식과 마을의 문화 경관으로 인해 매스미디어에 노출되고, 때마침 문화 관광의 붐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도인촌지리산의 대표적인 관광지의 하나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지방 자치체와 정부에 의해 마침내 이곳은 공식적으로 청학동이라 명명되고 사회적으로 널리 인지됨에 따라 청학동으로 고착되었다.

묵계리청학동으로 알려지게 된 최초의 계기는 1956년경 신흥 종교인 갱정유도인(更定儒道人)들이 외부에서 들어와 학동마을에 정주하면서부터였다. 집단 신앙촌의 독특한 경관 구성과 삶의 방식이 주위에 알려지고, 동시에 매스미디어가 도인촌의 장소 이미지를 복고적인 향수와 신비적인 공간으로 창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이에 갱정유도인들도 도인에서 청학동 사람으로 정체성을 바꾸며, 1986년에 청학동으로 명명하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니까 현대의 묵계리 청학동도인촌은, 지리산 청학동이라는 이상향의 장소 이미지로 포장되면서 관광지로서의 이상향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지리산 청학동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지리산 청학동의 문화 현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현대인은 장소 정체성과 진정성이 소멸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근현대 지리적 지식의 확장은 세계의 모든 장소를 낱낱이 드러내어 버렸고, 자본주의적 가치가 지배하는 현대적 삶의 방식으로 말미암아 인간 존재의 장소적 본연성과 장소가 지니는 진정성은 상실되고 있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가 “시공간 압축의 근대적 과정과 현대적 자본주의의 공간적 상업화는 세상의 모든 장소를 추상화시키고 대상화시키며 간접적인 구경거리로 만들었다.”고 토로했듯이, 현대는 진정성 있는 관계로 맺어질 수 있는 장소와 공간이 해체된 시대인 것이다. 장소의 해체는 장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 심성의 해체로 직결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마음의 고향 혹은 이상향으로 은유되는 ‘인간 존재의 진정한 장소와 장소성으로의 귀환’이라는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우리 선조들은 희망의 공간이던 지리산 청학동을 꿈꾸며 현실의 고달픔을 달래고 미래의 소망을 엮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의 번영이라는 전도된 가치 척도가 인간 본연의 장소적 존재성과 장소가 지니는 의미와 가치를 지배하고 변질시킨 오늘날, 과연 우리에게 진정한 꿈과 희망의 이상향은 가능한 것일까? 이상향이 있다면 그곳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07.21 대표항목명 띄어쓰기 수정 이상향에서 도인촌으로, 지리산청학동의 변천 -> 이상향에서 도인촌으로, 지리산 청학동의 변천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