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925 |
---|---|
한자 | 河德休 |
영어음역 | Ha Deokhyu |
이칭/별칭 | 도경(道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병철 |
출생 시기/일시 | 1670년 |
---|---|
활동 시기/일시 | 1702년 |
활동 시기/일시 | 1709년 |
활동 시기/일시 | 1720년 |
활동 시기/일시 | 1727년 |
활동 시기/일시 | 1731년 |
활동 시기/일시 | 1744년 |
몰년 시기/일시 | 1754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
묘소|단소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진양(晉陽) |
대표 관직|경력 | 칠곡부사 |
[정의]
조선 후기 하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도경(道卿). 사직(司直)을 지낸 하진(河珍)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된 하광국(河光國)이며, 할아버지는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된 낙와(樂窩) 하홍달(河弘達)[1603~1651]이다. 하홍달은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1593~1666]의 아우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증직된 설창(雪牕) 하철(河澈)[1635~1704]이며, 어머니는 박신(朴紳)의 딸 고령 박씨(高靈朴氏)이다.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양정재(養正齋) 하덕망(河德望)[1664~1743]이다.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3대가 증직된 것은 하덕휴의 공덕 때문이다. 부인은 조석하(曺錫夏)의 딸 창녕 조씨(昌寧曺氏)이며, 그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하덕휴(河德休)[1670~1754]는 강건하고 총명한 자질을 타고 났으며 일찍부터 경서와 예학을 공부하였다. 1702년(숙종 2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청선전관에 제수되었다. 1709년(숙종 35) 광양현감(光陽縣監)이 되었는데, 변방의 실정을 잘 알고 있어 엄한 형벌을 쓰지 않아도 이속(吏屬)이 두려워하였다. 1720년(숙종 46) 흥양현(興陽縣)의 수령이 되어 고을을 다스릴 때 치적이 높았다. 어사(御史)가 그에 관해 조정에 보고하기를 “성품과 지식이 밝으며, 지혜롭고 학문이 넉넉하여 일 처리가 민첩하니, 일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 물 흐르듯 거침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1727년(영조 3) 평안도우후(平安道虞侯)에 제수되었다. 당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있던 이사성(李師晟)에게 미움을 받아 무고를 당해 재판에 회부되었다. 얼마 후 이사성이 파직되고 신원을 받았으며, 1731년(영조 7) 칠곡부사(漆谷府使)로 승진하였다. 마침 큰 흉년이 났는데, 정성을 기울여 백성을 구제하여 백성들이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다.
1735년(영조 11) 저평현에 산적이 출몰하여 영조가 특별히 하덕휴를 파견하며 진압하게 하여,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그 지역이 평안해졌다. 그 후 창성방어사(昌城防禦使)가 되었다가, 외직에만 있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는 백형(伯兄) 양정재 하덕망과 함께 한집에 거처하면서 학문을 강마하며 화목하게 지냈다. 당시 사람들이 그들의 모습을 “연당(蓮堂)의 두 학(鶴)이다”라고 칭송하였다.
[학문과 저술]
『진산세고(晉山世稿)』에 『중추공유고(中樞公遺稿)』가 수록되어 있다.
[묘소]
묘소는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선영의 옆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44년(영조 20) 수직(壽職)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