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3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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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達梁鎭 |
영어공식명칭 | Dallyangj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변남주 |
폐지 시기/일시 | 1598년 - 달량진 이진진이 설치됨에 따라 폐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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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22년 - 달량진 만호 수군진에서 종9품 권관진으로 격하 |
관할 지역 | 달량진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설치되었던 조선시대 수군진.
[개설]
달량진(達梁鎭)은 완도의 관문에 해당하는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동쪽 해변에 위치한다. 달량진은 해남군과 완도군 달도(達島) 사이의 물목에 설치되었던 조선 시대의 수군진으로 전라우수영에 편성되었다. 관련 기록은 조선 건국 후인 1406년(태종 6)에 처음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달량의 원래 지명은 달도였는데 완도군의 달도와 구분하려고 고달도(古達島)라 칭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에 잠시 해남현에 속한 수군진이었다가 영암군으로 이속되었다. 1522년에 만호진은 완도의 가리포로 이전되고 권관진(權管鎭)으로 격하되었다. 달량진왜변 후에 인근에 이진진이 설치됨에 따라 폐진되고 대신 성(城) 내부에 영암군의 남창(南倉)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달량진에는 왜구가 1483년·1552년·1555년 세 차례 침략하였으며, 관련 유적으로 달량진성이 잔존한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 말부터 16세기 무렵까지 한반도의 연안은 왜구가 창궐했다. 왜구는 14세기에 고려의 남해안을 침입하여 쌀과 백성들을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정부에서는 무력으로 진압하고, 진도 등 섬에 설치된 군·현의 백성들을 내륙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른바 ‘공도(空島)[섬을 비움] 정책’이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연안에 있는 군·현의 소재지를 북쪽의 내륙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공도 정책에 따라 해남현의 경우는 1409년(태종 9)에 영암군 시종면에 이거해 있던 진도군과 병합하여 해진군을 설치하고 진도군 주민을 해남군 삼산면 일부 땅으로 다시 옮기도록 하였다. 이어 1412년에는 해남현의 소재지도 현산면에서 삼산면으로 옮기었다. 이러한 조치와 아울러 연안을 방어하기 위하여 달량과 같은 수군진을 설치하였다.
[내용]
달량의 지명은 남창리 남쪽에 인접한 완도군 원동리 달도에서 유래한다. 남창리와 달도를 건너는 물목에 나루가 설치되어 달량으로 칭하게 되었다. 달량은 달도 또는 고달도라 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478년(성종 9)에 전라도관찰사 이극중의 건의에 따라 달도의 지명은 달량으로 개칭되었다. 달량진의 진성은 남창리 마을을 둘러싸고 축성되었으나 현재는 동쪽 해변에 동벽과 북벽 일부만 잔존한다. 약 500m 성터는 민간의 담장이나 안길로 변용되었다. 동벽의 경우는 잔존 길이 115m에 높이 330~420㎝, 아래 폭 330㎝, 윗폭 100㎝에 이른다. 북벽의 경우는 잔존 길이 90m 정도에 폭이 90㎝이며 성벽은 25~70㎝의 장방형의 돌로 기초를 다지고 20~50㎝ 막돌로 쌓아 올렸다. 현재는 민가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주변에서는 청자편과 백자편이 수습된다. 달량[남창]은 제주도 가는 관리들이 바람을 기다리는 후풍처로 이용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설치된 남창은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창고이며, 달량진 성내에 세워진 해월루는 관리들이 배를 기다리며 소일하는 정자이다. 달량진성은 2010년 11월 19일 해남군 향토문화유적 제19호로 지정되었다.
[변천]
달량에 수군진의 처음 설치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여러 기록에서 초선 초기에 이미 설치되었음이 확인된다. 달량 수군진에 대한 첫 기록은 1406년(태종 6)에 『태종실록(太宗實錄)』에 등장한다. “설연(雪然)을 여색(女色)을 간범한 죄로써 장(杖) 60대를 때리고 전라도 해남현 달량의 수군에 충군시키고”가 그것이다. 이어 1415년(태종 15)의 “달량만호(達梁萬戶) 이지로(李智老)”에 대한 기록과 1429년(세종 11)의 “난량(蘭梁)의 병선을 달량으로 옮기라”는 기록 등이 있다. 이때는 달량포구 해상에 병선을 배치하여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는 형식이었다. 달량에는 중선 7척, 맹선 2척, 선군 519명, 초공(梢工)[키잡이 사공]이 배치되었다. 달량 만호수군진성의 축조는 1499년(연산 5) 무렵에 축성이 되었다. 『연산군일기』 1499년 7월 12일 기사에 달량의 축성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다. 장령 손번(孫蕃)은 “전라좌도는 적의 침략을 받는 가장 긴요한 곳이므로 마도(馬島)·달량(達梁) 등처는 금년에 쌓아야 한다.”라고 하자 연산군은 “축성에 관한 일은 마땅히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되, 다만 그 성을 쌓지 않았다가 후에 만약 일이 생기면 너희들이 그 과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후 1522년 왜구의 침략 시 달량진성이 등장하므로 연산군 무렵에 관방성으로 축성된 것이 분명하다. 달량의 만호 수군진은 강진[지금의 완도]의 가리포로 옮기었다. 그 시기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1522년(중종 17)이라 하고,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영암군 고적조의 기록에서는 당시에 “달량폐진(達梁廢鎭)으로 나와 있으며 수군만호가 있었으나 1521년(중종 16)에 강진의 가리포에 합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외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 의하면 1522년(중종 17)에 가리포로 이전했으며 이후 만호 수군진이었던 달량진은 종 9품 권관진으로 격하되어 운영되다가 달량진왜변 후에 인근에 이진진이 설치됨에 따라 폐진되고 대신 성(城) 내부에 영암군 남창(南倉)을 설치하였다.
[의의와 평가]
달량진은 완도 간 중요한 물목에 위치하여 조선 건국 직후에 병선이 배치되었던 관방진이다. 내륙으로 진입하려는 왜구들의 침략이 잦았다. 임진왜란의 전초전이라 평가되는 달량진왜변이 발발한 현장이기도 하며 제주도 가는 배를 기다리는 후풍처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