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3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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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於蘭鎭 |
영어공식명칭 | Eoranj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변남주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에 설치되었던 조선시대 수군진.
[개설]
어란진(於蘭鎭)은 조선 건국 초기에 해남반도 해진군의 방어를 위하여 삼촌포[지금의 해남군 화산면 연곡리]에 병선을 배치한 것이 시초이다. 그러나 삼촌포의 어란 병선은 남쪽 바다의 섬으로 이동하였다가 지금의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에 수군진성을 쌓고 수군진으로 정착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왜구의 침탈을 벗어나기 위한 공도 정책으로 1350년부터 영암의 시종면에 있었던 진도군과 현산면 고현리에 있었던 해남현을 1409년 병합한 후 1412년 삼산면으로 이전한 해진군 등의 관방(關防)으로 어란량에 병선이 배치되었다. 하지만 어란이 있던 삼촌포 위치가 해남반도의 북쪽에 있어 남쪽 해상에 출현하는 왜구를 방어하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따라서 어란은 2차례 남쪽으로 이동되었다.
[관련 기록]
어란진성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석성으로 축성되었으며 둘레 1407척, 높이 8척, 치첩(雉堞)[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은 325첩이고 안에 우물이 1곳 있다고 하였다. 또 『호남진지(湖南鎭誌)』에는 객사[3칸, 남향], 동헌[동향], 내아[6칸], 외아[6칸], 외삼문[3칸, 남향], 군기고[3칸, 남향], 장교청[4칸, 남향], 작청[9칸, 남향], 사령청[4칸]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
화산면 연곡리의 고어란(古於蘭)에서는 성은 발견되지 않고 육지부에서 청자편만 출토된다. 송지면 어란진성은 정방형의 형태로 남북 약 166m 동서 약 175m이다. 동문, 남문, 북문이 옹성 형태로 있었으나 모두 멸실되었다. 성의 규모는 대부분 훼철되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지적도를 통하여 측량된 길이는 약 700m이다. 서측의 성벽 약 74m, 남측의 성벽 약 5.5m가 잔존하여 있다.
[변천]
어란은 삼촌포에서 어란도 섬을 거쳐 지금의 송지면 어란리에 수군만호진이 정착하면서 어란 지명도 현재로 고정되었다. 그러나 1895년 수군진의 혁파로 관방의 기능은 정지되었다.
조선 전기 어란은 병선이 배치된 수군진이면서 제주를 오가는 입출항지이기도 하였다. 이에 제주도 관승의 자제를 데려와 어란에 배치하여 제주에서 육지로 도망하여 나오는 자를 가려내게 하였다.
어란의 수군에 대한 기록은 『태종실록(太宗實錄)』1417년(태종 17)의 어란량 수군만호(於瀾梁水軍萬戶) 송안(宋安) 파직과 관련한 기사가 최초이다. 어란 지명은 『세종실록(世宗實錄)』에서 란양(蘭梁)이라 약칭하기도 하였으며, 조선 초기부터 수군진과 함께 이동하여 3곳에서 나타난다.
첫 번째는 ‘해남현 남쪽 25리[약 9.82㎞]’에 있던 화산 연곡리의 ‘고어란’이다. 이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전라도조에 의하면 어란은 “해진군(海珍郡)[1409~1437, 해남현과 진도군을 병합한 지명]의 남쪽 삼촌포(三寸浦)에 있다. 중선 4척과 군사 480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라고 하였고, 해진군 조에서는 “관방은 어란이며 병선이 머무른다.”라고 하였다. 당시 해진군의 읍치는 삼산면 녹산역 터에 있었으므로 『한국지명총람』[1982]에서 등장하는 ‘고어란’은 화산면 연곡교 남쪽이다. 이때 어란 병선은 해상에 정박하여 해진군 연안을 방어하였다.
두 번째 어란진의 위치는 섬이다. 『세종실록』[1434]에서 어란의 병선을 제주도 가는 배가 머무르고 진도가 보이는 삼내도(三內島)로 이전해야 한다는 상소가 기록된 데 이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해남조에서 고어란포는 해남현의 남쪽 25리[약 9.82㎞]에 있고, “어란포영은 해남현의 남쪽 34리[13.35㎞]에 수군만호 1인이 있다.”라고 기록되었다. 또 윤휴(尹鑴)[1617~1680]는 『백호전서(白湖全書)』에서 “(이순신이) 9월에 어란도에서 적병을 패배시켰다.”라고 하였으며, 1656년에 기록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서도 “해남현 남쪽 34리[13.35㎞]”에 있다고 하였다. 또 18세기 초반 지도인 『호남우도』 지도에 어란도가 보이고,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1736~1806]과 『대동지지(大東地志)』[1864]에서는 어란도 폐영이라 하고 있어 어란도로 수군이 이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란도는 기록으로 보아 삼내도로 추정되며, 삼내도는 당시 황원현[해남 화원반도]에 속하였으며 지금의 완도군 마안도[삼마 안내]이다.
세 번째로 해남현 어란의 수군진은 조선 시대 영암 땅이었던 지금의 송지면 어란리로 이동하여 수군진성을 쌓고 정착하였다. 해남현의 어란에서 영암군의 어란으로 변경된 기록은 1757년에 편찬된 『여지도서』가 가장 이르다. 『여지도서』의 영암군조에 따르면 어란진은 영암군의 남쪽 150리[58.9㎞]에 있으며, 종4품 수군만호가 1명, 군관 10명, 리(吏) 20명, 지인(知印) 3명, 사령 20명이 배속되었다. 이어 『영암읍지』[1895]에서는 수군만호 1명에 대변군관 15명, 진리 20명, 사령 7명, 군뢰 2명, 지방군이 267명이 배속되었으며, 전선 1척, 병선 1척, 방선 1척, 사후선 2척이 배치되었음이 기록되었다. 어란진은 1895년 폐진되었다.
[의의와 평가]
어란 병선과 수군진은 한반도의 남단인 해남반도에 위치하여 조선 초기부터 관방진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남해안에 위치한 연해읍들이 내륙으로 북진하는 읍치와는 반대로 남진하는 정책 사례를 잘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