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8년 2월 7일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5·10총선거를 반대하여 발생한 구국투쟁.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우익들은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이승만은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총선을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하자는 입장을 내세우며, 미국에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둔 시기였으므로 우익진영에서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에 좌익...
-
한국전쟁 중 1951년 2월 7일 지리산 공비 토벌을 위해 민간인 마을을 불태워 빨치산 보급처를 소개한 작전. 견벽청야란 중국 한나라 하승천이 그의 저서 『안변론(安邊論)』에서 변방을 방어하기 위해 ‘집단 주민 소개책(疏開策)’으로 언급한 것에서 유래한다. 이후 중국의 백승희 장군이 항일 전투에서 견벽청야 전법을 모방하여 게릴라지구의 모든 산림과 산간마을을 불살라 없앰으로써 적의...
-
고려 후기 경상남도 함양군에 왜구가 침입하여 약탈한 사건. 왜구는 대략 13~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인 해적 집단을 총칭하는 말이다. 왜구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당시 일본이 남북조 쟁난기에 처하여 사회적 불안이 증대되는 가운데 무사들의 토지 쟁탈, 농지를 잃은 농민의 빈곤화, 경제적으로 무력해진 하급무사의 양산, 기근에 허덕이고 있던 쓰시마[對馬...
-
1950년에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국민보도연맹 함양군지부와 관련해 발생한 학살 사건. 남·북 분단 과정에서 좌우 이념 갈등은 1948년 단독정부 수립 이후에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좌익사상을 가졌거나 활동 경험이 있었던 자들에 대한 탄압이 매우 거셌다. 1949년 4월 20일 이승만 정권은 해방 후 남한 내에서 활동하였던 남로당 계열의 좌익분자나 좌익 계열 활동 경험자들을 적극 전향...
-
1951년 12월 10일,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금반리에서 빨치산 부대와 국군·경찰특공대 간에 벌어진 전투. 1951년 12월 무렵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 가운데 지리산 외각인 법화산 고지에서 국군부대가 빨치산 제4지대[독립 부대]와의 교전으로 수백 명의 빨치산을 몰살시킨 전투가 있었다. 법화산 교전 이후에 함양군 휴천면 휴천지서를 작전본부로 한 토벌 경찰특공대는 총 병력 약 1...
-
1951년 지리산 노장대 일대에서 국군 전투부대와 지리산 빨치산 부대 간에 벌어진 전투. 1951년 지리산 동북자락 노장대 일대는 울창한 산지형 사이로 천연동굴과 망바위·배바위·독바위로 이어지는 기암들을 따라 억새로 엮어 만든 빨치산들의 비밀 아지트[일명 비트]들이 많이 있었다. 비밀 아지트에는 이영애(李英愛) 부대와 이영상(李永祥) 부대 등 2개 대대 수백명이 은신하고 있었다....
-
1950년 9월 27일부터 28일까지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대황재 일대에서 발생한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 한국전쟁 중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9월 20일 유엔군의 주력부대가 한강을 넘어 26일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유엔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에 북한노동당은 9월 중순경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에 후퇴 명령을 내...
-
1952년 2월 한국전쟁 중에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동호고지를 점령한 빨치산 부대와 국군 토벌대 간에 벌어진 전투. 한국전쟁 전후 지리산에는 대규모의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들이 조직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1950년 9월 중앙당의 지시에 의해 서부경남 유격대가 함양군 문정리에서 조직되어 경상남도 지역 빨치산의 활동을 총지휘하였다. 동호마을 전투와 관련된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
1952년 9월 2일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일대에서 발생한 마을 약탈 및 민간인 학살 사건. 함양군 마천면 삼정마을은 여순사건 이후 한국전쟁기[1950~1961]까지 지리산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빨치산들의 출몰로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한 군대와 경찰의 수색, 색출 작전에 의해 민간인들의 피해가 많았던 지역이다. 이 가운데 ‘마천면 민간인 학살 사건’은 1952...
-
1498년 7월에 사관 김일손이 「조의제문」을 사초에 기록함으로 인해 발생한 사화. 김일손은 함양군 출신인 정여창과 두터운 교유 관계를 유지하였다. 1498년(연산군 4) 7월에 함양군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면서 한 달여간 무오사화가 진행되었다. 무오사화의 발단은 김일손이 사초에 등재한,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작성한 「조의제문」의 글과 연관된다. 무오...
-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문하마을에서 1949년에 발생한 여수·순천 반란군 토벌 전투. 1948년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가시화되자, 이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국으로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8년 발생한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 사건[여순사건] 등이다. 지리산 빨치산과 직접 관계된 1948년 10월 19일의 여순사건은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
-
고려 후기에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사근성을 중심으로 전개된 왜구 토벌 전투. 1380년(우왕 6) 8월 왜구는 함양군의 사근역(沙斤驛)에 주둔하면서 총공세를 펼쳤다. 이때에 함양군으로 들어온 왜구는 경상도 연해지역으로 상륙한 왜구가 아니라, 1380년 8월 금강 하구 진포 전투에서 패배하여 내륙으로 도주 중이었던 왜구 잔당이었다. 원수 배극렴(裴克廉)·김용휘(金用輝)·지용기(池湧...
-
경상남도 함양군 지역에서 한국전쟁 발발 이후 빨치산 토벌을 위해 지리산의 사찰·암자 등을 방화·소개한 작전. 지리산 일대의 함양 지역에는 신라 시대 이후 고려 시대까지 융성했던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많은 사찰과 누각, 암자, 불상 등이 세워졌으며 현재에도 일부 남아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신라 시대 사찰로 함양군 휴천면의 엄천사 터[현재 법화암(法華庵)]는...
-
해방 이후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빨치산의 거점과 식량보급 차단을 위해 실시한 군경의 빨치산 토벌작전. 1948년 말부터 여순사건으로 인해 지리산으로 입산한 빨치산들이 함양군의 관공서를 공격하는 등 본격적인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 군과 경찰은 빨치산과 직접 전투를 벌이고, 빨치산의 거점과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지리산 산간마을 소개 작전을 펼쳤다. 군과 경찰은 작전지역이던 산간마을을...
-
1951년에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세동마을에서 발생했던 빨치산과 국군토벌 간의 전투. 한국전쟁 때인 1951년 2월 7일에 지리산 일대 공비 토벌작전을 전개하던 중, 육군 11사단장 최덕신의 명령으로 빨치산 게릴라지구 내에 모든 산림을 비롯해 산간마을을 소개하는 견벽청야작전을 전개하였다. 빨치산의 보급로와 숙식을 차단함으로써 빨치산 세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어떠한 장애물도...
-
1949년 9월 21일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에서 빨치산 토벌 과정 중 군경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 여순사건 이후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와 경찰이 군사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당했다. 함양군 수동면 도북마을의 뒤편 산 너머에 있는 덕갈산[668m]은 한국전쟁 이전부터 빨치산들이 활동하던, 지리산·감악산과 연결되는 주요 통로였다. 이 때문...
-
1946년 4월 20일부터 23일까지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에서 해방 후 최초로 전국 아나키스트들의 대표자들이 모여 무정부주의를 결의한 대회. 1920년대 해외 독립운동 진영에는 국가 또는 정부를 지배계급이 국민 또는 민중을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낸 권력기구로 이해하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사상을 토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흐름이 존재하였다. 아나키스트들은 강자에 의해 다수의 민중이...
-
602년 8월에 경상남도 함양군과 전라북도 남원시 경계인 아막성에서 신라와 백제가 싸운 전투. 아막성은 모산성으로 부르기도 한다. 아막성은 경상남도 함양군과 전라북도 남원시 동면 경계 부근인 팔량치 고개에 위치한다. 7세기 초 신라는 왕권과 대·내외적 상황이 안정화되면서 옛 가야 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고히 하고, 소백산맥 이서 지역 진출을 시도하였다. 백제는 신라의 성장...
-
1950년 7월 24일부터 7월 29일까지 한국전쟁 중에 미 24사단 및 국군 공동작전으로 전개된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지역 방어전투. 한국전쟁 발발 후 조선인민군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7월 25일경 육십령 고개를 넘어 함양군으로 진격해 왔다. 서남부 지역으로 진격한 북한군 4사단[사단장 이권무]이 안의와 하동 지역에 도달하자 미 8군 사령관[W.H. 워커 중장]은...
-
1919년 3월 31일에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석천리 안의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1918년 1차대전 종결 이후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와 갑작스러운 고종 황제의 붕어 등을 계기로 조선 민중들이 전국적으로 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3.1만세운동의 영향은 경상남도 함양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에서 전병창(全炳昌)·임채상(林采尙)·정순완(鄭淳完...
-
1593년 6월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 출신의 무장 오희남이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했던 사건. 오희남은 경상남도 안음현 모동리 무월 출신[현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으로, 함양오씨 성재공(誠齋公)의 현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953년 6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수문장으로 항전하다가 진주성 함락과 함께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선무원종공신...
-
1862년 3월에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발생한 반정부 농민 항쟁. 경상남도 함양의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1862년(철종 13) 3월 16일에 발생하였다. 농민봉기의 주된 원인은 삼정(三政)의 문란을 비롯해 환곡의 폐단에 대한 시정 요구가 수용되지 않은 것과 지역 관리들의 탐학 때문이었다. 19세기는 조선의 역사에서 격변의 연속이었다. 그 전반기 60여 년은 이른바 세도정치...
-
1592년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남도 함양군에 온 경상우도초유사 김성일이 민심수습과 의병모집을 했던 사건.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로 임명된 김성일은 1592년 5월 4일에 함양군에 도착하여, 8월 6일에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이동할 때까지 약 3개월간 함양군을 거점으로 민심위무와 항전독려 및 의병모집 활동을 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왜적의 부산포...
-
고려 전기 경상남도 합주의 속현 감음현 사람인 자화와 의장이 정서의 처를 무고한 사건. 정서(鄭敍)의 처 임씨는 정안임씨 임원후(任元厚)[1089~1156]의 딸이며, 인종 비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의 여동생이다. 정안임씨는 당대 문벌가문으로서, 임원후는 문하시중을 역임했고 임유(任濡)[1149~1212] 등 임원후의 다섯 아들도 평장사를 비롯한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
조선 후기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에서 정희량이 일으킨 난. 정희량(鄭希亮)은 정온(鄭蘊)의 현손이다. 본명은 준유(遵儒)이며 참봉(參奉) 중원(重元)의 둘째 아들이다. 안의의 사족으로 노비와 전택이 많았다. 당시 붕당의 전개 양상에서 남인을 실각시키고, 그들을 처벌하는 경중에 따라 서인 내에서도 노론과 소론의 입장 차가 있었다. 재야의 남인들과 소론 계열에서는 노론 세력들...
-
한국전쟁 발발 이후 1951년 11월 25일부터 1952년 3월 15일에 걸쳐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에서 벌인 공비 진압 작전.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 이후 한국전쟁기까지 지리산·덕유산·소백산·태백산 등 산악지대에는 월북하지 않은 채 남한에 잔류한 공비(共匪)[공산당 유격대]들이 많았다. 공비들의 정식 명칭은 ‘조선인민유격대’ 또는 잔당의 의미인 ‘빨치산’이다. 한국전쟁...
-
1950년에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지리산 일대 진관고지에서 전개된 빨치산과 국군 전투. 한국전쟁 중인 1950년 8월~9월에 낙동강 전투에서 패하고 후퇴하면서 퇴로가 막히자, 지리산으로 대거 입산한 인민군들은 빨치산들과 합류하여 유격활동을 전개하였다. 1950년 10월 함양군 지리산 일대 엄천계곡에서 넘어온 빨치산들은 인민군의 직사포를 무제봉 진관고지에 설치해 놓고 휴천면 목현리...
-
1947년 7월 27일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개최된 임시정부 수립촉진을 위한 인민대회. 해방 이후 좌익·우익 갈등이 계속되었고, 이는 함양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좌익과 우익이 충돌했다. 함양읍의 함양시장에서 3·1절 행사를 끝낸 좌익계 군중들이 해산하면서 우익의 국민회와 광복청년회관을 습격하여 파괴한 것이다. 1947년 5월 15일 반탁시위 과정에...
-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대한민국 국군 제3연대 제3대대, 함양경찰서, 특공대 등이 함양군 민간인들을 집단 학살한 사건. 함양군은 지리적으로 북쪽의 덕유산과 남쪽의 지리산 사이에 있어 한국전쟁 이전부터 빨치산의 활동 거점이 되어 온 지역이다. 1949년 5월 이후부터 1950년 3월까지 지리산을 거점으로 활동해 온 빨치산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빨치산과 내통·협조...
-
1945년에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에서 하준수에 의해 발생한 함양경찰서 습격 사건. 일제 강점기 말기에 학병이나 징병을 거부하고 산으로 숨어들어 간 청년들이 있었다. 함양군에서는 하준수가 지리산에서 징병 및 징용을 거부한 청년들을 모아 무장대인 보광당을 조직했다. 보광당은 무기 매입, 주재소 습격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해방이 되자 무장대에서 활동했던 청년·학생들이 주력이...
-
1951년 2월 7일 경상남도 함양군 일대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1950년 9월 25일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육군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중장)이 창설되고, 9연대장에 오익경 대령, 3대대장에 한동석 소령이 임명되었다. 사단 사령부 및 9연대·13연대·20연대 등은 미 9군단장의 작전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다. 1950년 11월 29일 남원에서...
-
1919년 3월 28일에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용평리 함양장터에서 일본제국주의 지배에 항거하여 일어난 만세운동. 1918년 제1차 대전 종전 후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의 원칙으로 조선의 독립운동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또한, 고종 황제의 갑작스러운 붕어는 민심을 크게 동요치게 하였다. 전국적인 단위로 만세운동이 벌어진 배경이 되었고 경상남도 함양군도 만세운동에 가세하였다...
-
해방 이후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벌어진 빨치산 활동. 함양 지역에서 활동한 빨치산들은 1948년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으로 입산한 세력과 인민위원회 활동을 벌이다가 입산한 세력으로 나뉘어진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국군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여수와 순천 등 전라남도...
-
개항기에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목적으로 진행된 의병의 활동. 경상남도의 의병 활동은 민족의 독립을 수호하려는 의도에서 주민·지식인·유생·농민 등이 합세하여 지리산을 중심으로 꾸준하고 지속적인 항일 투쟁을 진행한 점이 특기할 만한 것이다. 지리산과 덕유산을 왕래하며 전개된 서부경남의 의병은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경상남도의 대표적 의병전이었으며, 노응...
-
고려 후기에 경상남도 함양군과 전라북도 남원시의 경계 접점인 황산에서 이성계 등이 왜구에게 크게 이긴 전투. 이성계는 함양군의 사근역과 함양성을 공략하고 서쪽으로 진격했던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황산전투에서 사살하여 적의 사기를 무너뜨린 후 맹공격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황산대첩은 왜구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준 것으로, 이후부터 왜구의 기세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비록...
-
정유재란 때인 1597년 8월 16일 경상남도 함양군 황석산성에서 왜적의 공격으로 발생한 전투. 함양 황석산성은 석성으로 둘레는 2,924척[877.2m]이었다. 성 안에는 한 줄기 물줄기와 군창(軍倉)이 있었는데, 18세기경에 군창은 없어졌다. 1597년의 정유재란 때 왜군이 음력 8월 16일부터 황석산성을 공격하면서 8월 18일까지 3일간 지속된 공방전이다. 임진왜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