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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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過去와 現在를 잇는 價値, 孝 - 龍珠寺 |
영어공식명칭 | Filial Piety, the Inherited Value / Filial Piety, Value that connects the past and the present – Yongjoo-sa Buddhist Temple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 18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양섭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21년 - 용주사 1차 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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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79년 - 용주사 2차 중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94년 - 지장전 건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0년 - 성용해(成龍海) 총섭의 중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1년 - 용주사, 31본산으로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2년 - 천보루(天保樓) 33칸 중수, 종각(鐘閣) 1칸 신설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3년 - 대웅보전(大雄寶殿) 중수, 대향각(大香閣) 중건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1년 - 구제 200칸 중수, 30여 칸 개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5년 - 용주사,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5년 - 대웅보전 중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1년 - 3층 부모은중경탑(父母恩重經塔)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7년 - 대웅보전 중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3년 - 천불전 건립, 만수리실 개축 |
[정의]
경기도 화산에 1790년(정조 14) 정조가 현륭원의 원찰로 창건한 사찰.
[개설]
용주사(龍珠寺)는 1790년(정조 14) 정조의 명으로 화산[花山=현 화성]의 현륭원(顯隆園) 옆에 창건한 원침(園寢) 사찰이다. 장헌세자의 묘를 현륭원으로 이장한 이후 현륭원을 관리하고, 재수(齋需)에 이바지하기 위해 갈양사(葛陽寺)의 옛 터에 건립되었다. 용주사의 건립에는 생부에 대한 정조의 효심과 향후 추후 장헌세자를 국왕으로 추숭하고자 했던 계획이 내포되어 있다. 건립 당시 용주사의 건물은 총 249칸으로 구성되었고, 식수 공급을 위한 석정(石井) 50칸 및 연못 1곳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 가운데 제각(祭閣)이 장헌세자를 추모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때문에 정조 연간 용주사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총섭(總攝)보다도 높은 승통(僧統)에 주지가 임명되는 은전을 받았으며 경제적 대우도 다른 사찰에 비해 높은 수준이었다. 다만 정조 사후 용주사에는 일시적인 시혜만이 베풀어졌을 뿐 정조대 만큼의 지속적인 경제적 지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용주사는 일제 강점기 식민지 종교정책에 따라 31본산(本山)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어 경기 남부지역의 수원군, 평택군, 안성군, 죽산군과 용인, 안산 및 평안북도 철산과 의주군 일부 지역의 54개 사암을 관리하였다. 중심 사찰로서 차지했던 용주사의 위상은 오늘날까지도 유지되어 수원, 용인, 안양 등 경기도 남부 지역에 위치한 80여개의 말사와 암자를 거느리면서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본사로서 사격(寺格)을 유지하고 있다.
[창건 배경]
정조는 1789년(정조 13)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건의에 따라 양주 배봉산에 위치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이름하였다. 이듬해인 1790년(정조 14) 현륭원을 관리하기 위해 그 옆에 사찰을 건립하였는데, 그것이 용주사이다. 현륭원과 용주사는 정조가 왕세자의 나이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준 이후 스스로는 상왕(上王)으로서 화성(華城)에 머물고, 최종적으로는 장헌세자를 국왕에 추숭하고자 했던 구상 가운데 일부를 실현한 것이었다. 정치적 파란 속에서 희생된 생부를 국왕으로서 기리고자 했던 염원, 아버지에 대한 정조의 지극한 효성이 깃든 곳이 바로 현륭원, 용주사인 셈이다.
용주사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건립되었는지를 보려면 먼저 현륭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헌세자는 영조 38년(1762) 임오화변(영조 38년, 1762)으로 생을 마감한 정조의 생부로, 우리에게는 사도세자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영조는 뒤주에 갇혀 죽은 아들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무덤을 수은묘(垂恩墓)로 정하였는데, 정조는 즉위 직후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숭하면서 수은묘(垂恩墓)를 영우원으로 승격시켰다. 그런데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의 누이 화평옹주에게 장가들었던 금성위 박명원이 ‘묘자리가 좋지 않다’며 영우원의 이장을 건의하였고, 이를 받아들인 정조는 장헌세자의 묘를 수원부 화산으로 이장한 이후 현륭원으로 개칭하였다. 장헌세자를 현륭원으로 천원(遷園)한 표면적 이유는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영조 연간 장헌세자에게 씌워졌던 정치적 혐의를 지우고, 추후 국왕으로 승격시킬 수 있는 밑바탕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현륭원지문」을 통해 장헌세자의 죽음은 영조와의 정치적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몇몇 역신(逆臣)들의 흉모로 인한 화란 때문으로 정리되었다. 정조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낸 순간이었다.
현륭원의 공역이 완료된 직후인 1789년 10월 17일, 현륭원의 천원에 참여했던 도감당상 이문원(李文源)은 능묘에서 치르는 제사를 위해 용주사의 창건을 건의했다. 이전 시기 원당(願堂) 혁파를 통해 불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던 정조였기에 원침 사찰의 건립을 주도하기 보다는 측근인 이문원의 제안을 수용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듬해인 1790년 2월, 정조는 현륭원에 참배한 이후 원침 사찰의 영건 후보지를 둘러보고 수원부에서 남쪽으로 30리 떨어진 용복면 화산을 용주사 창건지로 최종 결정하였다. 이곳은 신라 문성왕 16년(854) 염거(廉居) 선사가 창건한 이후 고려 광종 1년(950) 혜거(惠居) 국사가 중건한 갈양사의 절터로 알려졌으나 현재로서는 갈양사와 용주사의 관계를 입증할 만한 뚜렷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다만 숭유억불 기조를 유지했던 조선에서는 ‘사찰은 창건할 수 없지만 옛 터에 다시 세우는 것은 허용한다’는 규정을 『경국대전』에 명문화하고 있었으므로 갈양사의 폐사지로 남아있던 곳에 용주사를 건립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현재의 용주사 자리는 옛 절터라는 규정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현륭원과 가까우면서도 평지에 있어 교통이 좋다는 여러 조건을 충족시켰고 마침내 사찰 건립지로 지정되었다.
[창건 과정]
용주사는 건립 논의가 시작된 지 4개월 만인 1790년(정조 14) 2월 19일부터 공사에 착수했다. 공사에 들어가는 각종 비용은 용주사의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로 임명된 보경당(寶鏡堂) 사일(獅馹)이 각 사찰로부터 거두어들인 시주, 공명첩 250여장을 성급한 후에 조달한 재원으로 마련되었으며, 조정 관료와 각 궁방 및 시전상인들의 도움도 있었다. 용주사 건립은 수원부사 조심태가 총괄하고, 진위현령을 지냈던 이인찰방(利仁察訪) 조윤식(曺允植)이 실제 공역을 주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원부에 소속된 비장과 장교들도 공역에 필요한 물력을 제공하였으며, 승려들과 서울에서 내려온 공장(工匠)들이 공역을 담당하였다. 공사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공사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난 3월 21일에 주춧돌을 놓아 기초를 잡았고, 4월 10일 기둥을 세웠으며 4월 15일 상량(上梁)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8월 16일 불상을 만들어 대웅전에 안치하고 9월 29일에 봉안 의식을 행하며 용주사의 창건이 완료되었다.
창건 당시 용주사의 건물은 어떻게 구성되었을까? 1790년 10월 6일 보고된 공역 결과에 따르면 용주사는 제각(祭閣), 법당(法堂), 칠성각(七星閣), 향로전(香爐殿), 선당(禪堂), 승당(僧堂), 누각(樓閣), 삼문(三門)과 익랑(翼廊), 용가(舂家) 등 9개동 145칸, 중문 5곳 9칸, 내외의 장원(墻垣) 4곳 249칸으로 구성되었고, 식수 공급을 위한 석정(石井) 50칸 및 연못 1곳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용주사의 중심영역은 남북중심축 위에 대웅보전-천보루-삼문을 두고, 승당과 선당, 좌우 익랑을 좌우 대칭으로 배치하였다. 용주사의 창건 1년 뒤에 편찬된 『수원부읍지』에는 성황당(城隍堂) 6칸이 기록되었는데, 1791년(정조 15)에 신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호성전(護聖殿)이라는 이름이 붙은 제각은 장헌세자를 추모하기 위한 공간으로 매년 여섯 차례의 큰 제향이 올려졌다. 용주사 승려 중 ‘제각수직감관승(祭閣守直監官僧)’과 ‘제각수직고지기승(祭閣守直庫直僧’이 장헌세자에 대한 제향을 담당하는 직임을 맡았다.
정조는 1791년(정조 15) 1월 현륭원에서 치제(致祭)를 마친 이후 수원부로 돌아가는 길에 용주사를 방문하였다. 당대의 사료에는 용주사에 방문했다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 구체적으로 용주사에서 무엇을 하였는지에 관한 기록은 부재하지만 아마도 장헌세자의 재궁(齋宮)으로 지은 용주사 경내를 전체적으로 살펴보았을 것이다. 양란 이후 국왕이 왕실의 원찰을 방문한 적이 없었던 상황에서 이 같은 정조의 행보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당시 좌의정 채제공은 용주사의 상량문(上樑文)에 ‘용주사가 정조의 효심으로 창건되었다’는 취지의 내용을 기술하여 정조를 칭송한 바 있고, 정조 스스로도 용주사를 ‘현륭원을 호위하기 때문에 그 체통을 높였다’고 할 만큼 중시하였다. 정조의 용주사 방문은 애초 불교에 대한 포용력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겠지만, 현륭원의 원침 사찰로서 용주사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미였을 것이다.
[변천]
용주사는 현륭원을 천원(遷園)하기 이전에 양주 배봉산의 영우원에 있었던 사찰에 비해 큰 규모로 건축되었다. 선당과 승당은 각각 39칸으로 조성되었는데, 조선전기 광릉의 능침사인 봉선사(奉先寺)가 선당과 승당을 각 3칸으로 구성했던 것과 비교하면 규모의 차이를 짐작할 수 있다. 용주사는 현륭원을 보호하고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창건되었으나 이는 제향의 측면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용주사의 승려들은 장용영 외영에 소속되어 정조가 화성에 행차했을 때 호위부대로서 활동하였고, 현륭원에 나무를 심는 식목 사업, 종이를 만드는 작업도 담당하고 있었다. 이처럼 용주사 승려들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또한 그들에 대한 대우는 어떠했는지를 보면 용주사의 위상이 변화해온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용주사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가 바로 용주사의 승통(僧統)이다. 승통은 조선후기 승군(僧軍)의 최고 책임자로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총섭(總攝)보다 지위가 높았다. 용주사 창건 이후인 1790년 10월 7일 조심태는 용주사에 거접했던 승려 가운데 철학(哲學)을 특별히 승통(僧統)에 임명할 것을 국왕 정조에게 요청하였다. 창건 직후에는 용주사의 승려들에게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승군의 총섭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으나 용주사 승군의 지위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총섭보다 용주사 주지의 위상을 높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결과 용주사 승통의 위차는 밀양 표충사 승통과 남·북한산성 총섭에 비해서도 높게 설정되었다. 이제 용주사는 남·북한산성의 승군 총섭을 관장하고 전국의 사찰을 전제하는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용주사의 승려 가운데 제각수직감관승(祭閣守直監官僧)은 용주사의 제각인 호성전에서 매일 6번 장헌세자에게 재를 올렸고, 이와는 별도로 용주사에서는 매년 6차례 큰 제향을 올렸다. 또한 용주사 승도들은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의 외영(外營)에 소속되어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정조의 행차가 있을 때 용주사 승군들은 군복을 입고 국왕의 행차 호위군을 맡았으며, 이때 승통과 승군의 군장 및 복색은 총융청의 지원을 받았다. 이외에도 용주사 승려들은 현륭원 일대의 식목 사업에 동원되었고, 화성행궁에 필요한 종이를 뜨는 일을 관리하기도 했다.
용주사가 현륭원의 관리와 장헌세자의 제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던 만큼 재정을 안정화하기 위한 조치도 이루어졌다. 정조는 ‘용주사의 사체(事體)와 수호하는 법도는 오직 승려들에게 달려 있다’면서 승려들이 직분에 충실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용주사가 창건된 1790년 10월에는 용주사에 거주하였던 71명의 승려에게 우선적으로 6개월 간 쌀과 콩 등을 지급하였고, 1791년 1월에는 해마다 수원도호부에서 쌀 20석, 돈 100냥, 무명 16필 등을 지원할 것을 명령하였다. 또한 용주사는 수원과 용인 등지에 불량전답(佛粮田畓)을 115결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다. 신라 하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가지산문(加持山門)의 대표 사찰인 보림사(寶林寺)는 용주사에 소속되어 현륭원 제향에 필요한 향탄(香炭)을 상납하였다. 이처럼 용주사는 창건 과정에서부터 정조 연간 내내 국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용주사 소속 승도에 대한 대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찰로서의 위상도 현격히 높았다.
그러나 1800년(정조 24) 정조가 서거한 이후부터 용주사는 이와 같은 위상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후대 국왕의 행차나 왕실 행사가 있는 경우 용주사 승통에게 체가(帖加)하고 승군(僧軍), 승도(僧徒) 등에게 쌀과 베가 지급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일시적인 시혜에 그칠 뿐이었다. 정조 연간의 대우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으며, 기존에 받았던 각종 혜택도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1899년 『수원부읍지』에 나타난 용주사의 전답은 1832년에 비해 크게 축소된 상태로 확인된다. 이는 용주사의 소유 전답이 정조 사후 지속적으로 축소된 결과였다. 1806년 매년 지급되었던 물품이 중단된 것을 이유로 용주사 승도 80여 명이 일시에 도산한 사태는 정조가 용주사에 베풀었던 권리를 회복하고 ‘정조의 구제(舊制)’를 확인시키려는 단체 행동에 다름 아니었다.
정조 사후 용주사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정조 생전의 규모에는 못 미쳤으나 조정에서는 꾸준하게 용주사에 관심을 두고 필요한 물력을 지원하였다. 1821년에는 용주사가 잔폐해졌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공명첩을 지급하여 용주사의 보수를 지원하였는데, 이로써 1790년 창건 이후 중수(重修)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후에도 국왕이 현륭원에 행차할 때 용주사의 총섭과 승도들에게 시상을 내리거나 공명첩을 지급함으로써 운영 비용을 보충할 수 있도록 하였다. 1879년에도 성급된 공명첩 300장에 기반하여 용주사의 중수가 이루어졌다. 용주사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몇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쳤지만 기본적으로 창건 당시의 구조를 유지하였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식민지 종교정책 중 하나로 전국의 1,300여 사찰을 31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본사(本寺)와 말사(末寺)를 두어 통제하였다. 이때 용주사는 주요 사찰로서 그 위상을 인정받아 31본산(本山)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었다. 용주사의 말사에는 경기 남부지역의 수원군, 평택군, 안성군, 죽산군과 용인, 안산 및 평안북도 철산과 의주군 일부 지역의 54개 사암이 소속되었고, 용주사는 이들을 거느리는 중심 사찰로서 역할하였다. 이러한 용주사의 위상은 오늘날까지도 유지되어 수원, 용인, 안양 등 경기도 남부 지역에 위치한 80여개의 말사와 암자를 거느리면서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본사로서 사격(寺格)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