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467 |
---|---|
한자 | 崔婁伯孝子閣 |
이칭/별칭 | 최루백효자비각,최루백효자비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최루백로 313-6[분천리 165-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기중 |
건립 시기/일시 | 조선 숙종 - 최루백효자각 건립 |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206년 1월 11일 - 최루백 사망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6년 5월 20일 - 최루백효자각 화성시 향토문화재 제2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한명윤·밀양박씨 충열각 화성시 향토문화재로 재지정 |
현 소재지 | 최루백효자각 -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최루백로 313-6[분천리 165-1] |
원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수기리 |
성격 | 효자비각 |
관련 인물 | 최루백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높이 189㎝|폭 64㎝|두께 27㎝ |
소유자 | 수원 최씨 |
문화재 지정 번호 | 화성시 향토유적 |
[정의]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에 있는 고려 후기 효자 최루백의 정려.
[개설]
최루백(崔婁伯)[?~1206]은 고려 의종 대의 문신이다. 최루백의 아버지는 수원의 향리로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는데 최루백은 15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죽인 호랑이를 잡아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홍법산(弘法山) 서쪽에 아버지를 장사지낸 후 여막을 짓고 무덤을 지켰는데 어느 날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 "가양나무 숲을 헤치고 효자의 묘막에 다다르니 가슴에 느끼는 것 많아 감격의 눈물 끝없이 흐르네. 날마다 흙을 져다가 무덤 위에 더하니 그 정성을 아는 것은 밝은 달과 맑은 바람뿐이로다. 생전엔 봉양하고 죽은 뒤엔 묘를 지키니 누가 효성에 시종이 없다 하더냐"하는 최루백의 효를 칭찬하는 시를 읊고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최루백의 효성은 『고려사』에 수록되었으며 조선 세종은 최루백의 효를 기리는 글을 내렸다. 조선 숙종 때 최루백의 효를 기려 정려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현재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에 위치한 최루백효자비이다.
[건립 경위]
최루백의 효를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조선은 성리학적 윤리관을 지향하였기 때문에 그에 입각해 백성을 교화시키는 것을 중시하였다. 이에 성리학적 윤리의 근본이 되는 군신, 부자, 부부 관계의 모범이 되는 자에게 효자비를 세워줌으로써 사람들의 교화를 의도하였으며 더 나아가 유교적 인간상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위치]
원래 최루백효자각은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수기리에 위치해 있었으나 이후 최루백 후손들의 소유지인 현재의 위치[화성시 봉담면 분천리]로 옮겨졌다.
[형태]
정려비는 화강암으로 높이 189㎝, 폭 64㎝, 두께 27㎝이다. 비두는 비신과 별개로 투구형의 조각형태이며, 정방형의 비좌를 갖추었다. 비각은 팔각지붕의 겹처마집이며 기둥은 원주형 목주이다.
[금석문]
앞면에 '고려효자한림학사최루백지려(高麗孝子閑林學士崔婁伯之閭)'라고 새겨져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왕조는 각 지방의 대표적인 효행을 비석으로 남겨 풍속의 교화를 의도했다. 최루백효자비는 조선왕조의 효치주의에 따라 설립되어 당시 향촌민에게 미풍양속을 권장하는 귀감으로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