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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572
한자 金尙魯
이칭/별칭 경일(景一),하계(霞溪),만하(晩霞),익헌(翼獻)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윤성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02년연표보기 - 김상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21년 - 김상로 진사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34년 - 김상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37년 - 김상로 경기도 양정어사로 파견
활동 시기/일시 1740년 - 김상로 도청부사과로 가자
활동 시기/일시 1742년 - 김상로 강원도감사 파견
활동 시기/일시 1743년 - 김상로 대사성·부제학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44년 - 김상로 승지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45년 - 김상로 한성우윤·대사헌·도승지·병조판서 역임
활동 시기/일시 1746년 - 김상로 예조참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48년 - 김상로 공조판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50년 - 김상로 겸지경연 우빈객
활동 시기/일시 1752년 - 김상로 우의정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54년 - 김상로 좌의정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59년 - 김상로 영의정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62년 - 김상로 사도세자 처벌 참여
활동 시기/일시 1776년 - 김상로 사후 관직 삭탈
몰년 시기/일시 1865년 - 김상로 신원
묘소|단소 김상로묘 -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멱우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김유 묘역 -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산 8번지
성격 문관
성별
본관 청풍(淸風)
대표 관직 예조참판|영의정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화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경일(景一), 호는 하계(霞溪)·만하(晩霞)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공조정랑 김극형(金克亨), 할아버지는 전라도 관찰사 김징(金澄)이고, 아버지는 대제학 김유(金楺)이며, 어머니는 송박(宋搏)의 딸이다. 좌의정을 지낸 김약로(金若魯)의 동생이다. 아들로 이조참의를 지낸 김치양(金致讓)이 있다.

[활동 사항]

김상로(金尙魯)[1702~?]는 1702년에 태어났다. 20세인 1721년(경종 1)에 진사가 되고, 1734년(영조 10)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곧 지평(持平)이 되고 한림(翰林) 출신이라 하여 6품직으로 승진하였다. 응교(應敎)를 거쳐 정언(正言)·교리(校理)를 역임하였으며, 1737년(영조 13) 경기도 양정어사(良丁御史)로 나갔다가 돌아와 부교리가 되었다. 이어 헌납(獻納)·이조좌랑을 거쳐 1740년(영조 16) 도청부사과(都廳副司果)로 가자(加資)되고, 대사간과 승지를 역임하였다. 1742년(영조 18) 강원도 감사로 나가,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제할 것을 상소하였고, 이듬해 대사성·부제학이 되었다.

1744년(영조 20) 승지로서 무과에 폐단이 많음을 지적하고 엄격하게 시행하도록 건의하였다. 같은 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도내의 사태(沙汰)로 인하여 죽은 사람들을 구휼할 것을 상소하여 허락받았다. 1745년 한성우윤·대사헌·도승지·병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었다.

1748년(영조 24) 공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탕평책에 찬성하였다. 1750년(영조 26) 겸지경연 우빈객(右賓客), 1752년(영조 28) 우의정이 되었다가, 이듬해 파직되었다. 1754년(영조 30) 좌의정이 되고, 1759년 영의정이 되었다가, 말과 행동이 맞지 않은 사헌부 관리들은 교체시키도록 건의하였다.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하여 영조의 동조를 얻었다. 사도세자 사후 권력을 탐하고 이익을 좋아하여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였다는 죄목으로 청주로 귀양 갔으나, 두 달만에 특명으로 풀려난 뒤 봉조하가 되었다. 1765년(영조 41)에서 1769년(영조 45)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여 김상로에 대하여 역률(逆律)을 소급 시행하여 관작을 삭탈하였으나, 고종 때 다시 신원되었다. 성대중(成大中)이 지은 『청성잡기(靑城雜記)』에는 김상로가 역모 사건으로 추죄(追罪)되어 처자가 모두 제주(濟州)로 유배되었으나, 아내만 풀려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하계집(霞溪集)』이 있다. 집안의 화로 인하여 김상로의 생전에 남긴 글씨와 시집이 모두 흩어졌는데, 친필본이 일부 남아 있어 이를 모아 1921년에 간행한 것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중이다.

[묘소]

묘는 경기도 화성시 우정면에 있었으나, 2017년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에 있는 김유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 묘가 경기도 과천에 있었는데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수원에 행차하기 위하여 능행을 나설 때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장본인인 김상로의 묘 앞을 지나는 것을 심하게 불쾌하게 여겨 다른 길로 능행을 하였다고 한다.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에 있던 묘에 석물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도 정조 재위 시기에 묘가 훼손될 것을 염려하여 일부러 조성하지 않았다는 설과, 원래는 석물이 갖추어져 있었으나 정조 즉위 후 관작이 삭탈되어 철거하였다는 설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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