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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587
한자 李福源
영어공식명칭 Yi Bokwon
이칭/별칭 수지(綏之),쌍계(雙溪),문정(文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쌍학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송양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19년연표보기 - 이복원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38년 - 이복원 사마시 입격
활동 시기/일시 1754년 윤4월 3일 - 이복원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755년 11월 14일 - 이복원 사헌부 지평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64년 9월 17일 - 이복원 이조참의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75년 2월 10일 - 이복원 형조판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76년 9월 6일 - 이복원 한성부판윤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81년 7월 30일 - 이복원 『국조보감(國朝寶鑑)』 교정 당상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82년 8월 3일 - 이복원 좌의정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83년 4월 8일 - 이복원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발문 제술
몰년 시기/일시 1792년 8월 14일연표보기 - 이복원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92년 9월 29일 - 이복원 문정(文靖) 시호를 받음
묘소|단소 이복원 묘소 -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쌍학리 산40-18 지도보기
성격 관료
성별 남성
본관 연안(延安)
대표 관직 한성부판윤|우의정|좌의정

[정의]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선영과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수지(綏之), 호는 쌍계(雙溪),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남양부쌍부[현 화성시 우정읍·장안면 일대]에 거주하였던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6대손이다. 증조부는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조(李鳳朝), 조부는 경기감사를 역임한 이정신(李正臣), 아버지는 병조판서를 지낸 이철보(李喆輔)이며, 어머니 반남 박씨는 예산현감을 역임한 박필순(朴弼純)의 딸이다. 이복원은 두 차례 혼인하였는데, 본래 윤동원(尹東源)의 딸 파평 윤씨와 결혼하였으나 사별하고, 태릉참봉 안수곤(安壽坤)의 딸 순흥 안씨와 재혼하여 아들 이시수(李時秀)와 이만수(李晩秀)를 낳았다. 형제로는 이조승(李祖承)과 이학원(李學源) 등 두 아우가 있었지만, 이조승은 7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활동 사항]

이복원(李福源)[1719~1792]은 1738년(영조 14) 식년시에서 진사 1등으로 입격하였고, 1754년(영조 30) 양구현감을 지내던 중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55년(영조 31)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며, 재이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영조에게 상소하여 학문과 정사에 힘쓸 것을 요청하였다. 1759년(영조 35) 왕세손이 책봉되자, 좌익선이 되어 세자의 교육에 힘썼다. 1764년 9월 이조참의에 임명되었으며, 1775년 2월 형조판서가 되었다. 1776년(영조 52) 3월 영조가 죽자, 영조의 행장(行狀)과 시장(諡狀)의 제술을 담당할 찬집청의 당상에 임명되었다. 그해 9월 한성부 판윤이 되었으며, 규장각(奎章閣)이 설치되자, 황경원(黃景源)과 함께 규장각 제학이 되었다. 1781년(정조 5) 『국조보감(國朝寶鑑)』 교정당상에 임명되어 서명응(徐命膺)·채제공(蔡濟恭)과 교정을 주관하였다. 1782년(정조 6)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곧이어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1788년(정조 12) 기로소에 들어가면서 여러 차례 치사(致仕)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후 영중추부사로 군자감 도제조를 지내고, 1792년(정조 16)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쌍계유고(雙溪遺稿)』가 있다. 『규장각지(奎章閣志)』·『국조보감』·『명의록(明義錄)』 등 국가의 저술 사업에 참여하였으며,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눌재집(訥齋集)』의 발문을 작성하고, 『갱장록(羹墻錄)』·『궁원의(宮園儀)』를 찬진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쌍학리 산40-18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복원은 관료로 활동하면서 남양부[현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선영에 3차례 성묘하였고, 이 가운데 3번째인 1790년(정조 14) 정조로부터 역마(驛馬)와 함께 요전상(澆奠床)을 지급받았다. 1784년(정조 8) 7월 3일 세자의 보양관(輔養官)으로서 경기도 남양부의 남종 3구와 종 2구를 사급받기도 하였다. 사후 1개월 만인 1792년 9월 정조로부터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10월에는 현재 묘소가 있는 곳에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1797년(정조 21)년 8월 17일 정조현륭원[현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87-39]에 행행하면서 이복원의 아들인 직제학 이만수를 이복원의 묘소에 보내어 치제하게 하였다. 1800년(정조 24년) 1월 17일 정조이복원의 묘소 일대가 수세 장부에 기재되어 있다는 보고를 받고 면세 조치를 취하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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