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13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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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武鄕 華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기중 |
[정의]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다양하게 나타난 무관들의 활약과 여러 전투로 형성된 무향으로서의 화성 지역.
[개설]
화성 지역은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한강 유역을 수호하는 주요 거점 지역이었다. 삼국 시대에는 한강 유역에 대한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한 최적의 요충지로, 조선 시대에는 적군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 주목되었다. 그로 인해 화성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들이 다수 발생하였으며, 자연스레 뛰어난 무관들이 나라를 지키고자 화성 지역으로 모여들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말미암아 화성 지역은 오늘날까지 대표적인 '무향(武鄕)'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강에 향하다 : 화성 지역을 둘러싼 삼국의 경쟁]
화성 지역은 삼국의 한강 유역 쟁탈을 위한 무대였고, 동시에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차지하여야 하는 장소였다. 백제는 한성 시기에 남양만 해안가를 방어하고 고구려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지방 세력과 연계하여 청명산성을 축조하였다. 이후 5세기 후반 고구려가 남하하여 백제 대신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화성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청명산성 또한 고구려에 의해 화성 지역 방어 체계의 일환으로 재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화성 지역을 신라가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6세기 중반부터이다. 신라는 남양만을 통해중국과의 외교·교역을 진행하였고, 고구려와 백제의 견제에 대처하였다. 신라는 남양만 해안가에 당항진(党項津)을 설치하여중국과의 교역항으로 삼았고, 당항진을 보호하기 위해 당항성(党項城)을 축조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의 대중국 교섭을 차단하기 위해 당항성에 집중 공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의 공세를 견뎌낸 신라는 결국 나·당동맹을 성립시켰고,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 삼국 통일 전쟁 당시 당군이 들어온 곳도 남양만 앞의 덕적도였다. 당항진은 통일 후 당은포(唐恩浦)로 이름을 바꾸었고, 신라 하대까지 대중국 무역항으로 번영을 누렸다.
이처럼 청명산성과 당항성, 나아가 남양만을 차지하기 위해 삼국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삼국의 무력 경쟁은 추후 화성 지역이 무향으로서의 성격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배경이 되었다.
[화성에 향하다 : 구국과 근왕을 위한 용사들의 결집]
삼국 시대와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에도 화성 지역은 한양에서 충청도를 거쳐 호남으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한, 서울 외곽을 수호하는 주요 요충지였다. 이러한 입지 조건으로 인해 임진왜란 당시 화성·수원 지역 일대에 한양을 수복하려는 근왕병과 의병들이 결집하였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592년 5월 19일,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은 조정의 근왕 명령에 따라 삼남 지방 근왕병 5만여 명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근왕병은 수원으로 북진하여 전라도와 한양 간의 통로를 확보하고, 이후 한양에 주둔한 일본군 본진으로 진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용인에서 세 차례에 걸친 전투가 발발하였으나 조선군은 모두 패배하였다. 이때 광주목사로 있던 권율(權慄)은 일본군이 호남 지역으로 진격하여 오자 전라도 도절제사로 임명되어 이치전투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이후 권율은 1592년 12월, 수원의 독산성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크게 승리하여 화성 지역 일본군 세력을 위축시키고 조선군의 한양 탈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당시 관군만으로 일본군을 저지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각 지역에서는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전쟁 중 수원판관으로 임명된 홍계남(洪季男)도 그중 하나였다. 홍계남은 아버지가 일본군의 기습으로 사망하자 ‘복수지군(復讎之軍)’을 모집한다는 격문을 작성하여 8도에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후 의병장이 되어 일본군 근거지를 격파하는 데 앞장섰고, 결국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여 돌아왔다. 또한 양천과 안산 인근 산에 매복하였다가 일본군을 습격하는 등의 공을 세워 수원판사 겸 기호양도조방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후 홍계남은 영천군수 겸 영남조방장이 되어 김덕령(金德齡)·곽재우(郭再祐) 등의 의병장과 함께 많은 공을 세웠으며, 진주성에서도 승리를 거뒀다.
화성 지역은 병자호란 당시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636년(인조 14), 정묘호란 이후 청은 조선을 재침략하였다. 이때 청군은 15일 만에 한양에 도달하였고, 청군의 빠른 진격으로 인해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한 인조와 조정 신료는 남한산성에 갇혀 있었다. 당시 화성 지역에는 수원도호부사 구인후(具仁垕)가 수원과 인접 지역의 병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병력이 없었다. 게다가 경기도 수군의 진영마저 북방 방어 체계의 강화를 위해 남양부 화량진에서 강화도로 옮겨가면서 해안을 지키는 수군도 없었다. 사실상 화성 지역에 침략하는 청군을 방어할 방법이 전무하였으며, 포위된 남한산성과 인조를 구할 방도도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과 전라도 병마절도사 김준룡(金俊龍)은 함께 남한산성까지 길을 터 남한산성 안에 있는 인조를 구할 방도를 찾고자 하였다. 이시방과 김준룡은 전라도의 근왕병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진격하였다. 이시방이 이끄는 본진은 수원 지역에 주둔하였고, 김준룡의 선봉대는 남한산성과 40여 리 정도 떨어진 광교산에 진영을 구축하였다. 그러자 청 태종의 매부인 양굴리[揚古利]는 병력을 이끌고 광교산에 주둔한 조선군을 포위하여 남한산성과의 연결을 끊고자 하였다. 청군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수차례 화포 사격을 시도하였으나, 조선군은 광교산의 지리를 활용하여 청군의 공격에 맞섰다. 여러 차례의 접전 끝에 양굴리는 부상을 입었고, 청군이 퇴각하며 조선군이 승리하였다.
병자호란 중 의병 활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윤계(尹棨)의 활동이 대표적인데, 윤계는 병자호란이 일어난 시기 남양도호부사로 재직 중이었다. 윤계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근왕병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결국 청군에 잡혀 순국하였다. 윤계와 함께 의병에 참여한 부리(府吏) 홍신(洪信), 홍언인(洪彦仁), 김택(金澤)은 윤계를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조선 시대에 두 차례에 걸친 큰 전란을 거치는 동안 화성 지역은 구국과 근왕의 뜻을 품은 지사들이 향한 무향으로 이름났다. 실제로 병자호란 이후인 1651년(효종 2) 국왕과 조정 신료들은 수원부의 군병에 대해 극찬을 하였는데, 수원부사 이시백(李時白)은 ‘수원의 군사들이 중앙군인 훈련도감 군사보다 뛰어나기 위해 훈련에 힘쓴다’고 칭송하였으며, 1653년(효종 4) 대사성 이일상(李一相)도 수원부의 군병이 훈련도감에 비교해도 무력이 뛰어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효종은 ‘수원은 본디 무향’이라고 하며 긍정하였다. 당시 수원부에는 지금의 화성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수원과 함께 화성 지역이 대표적인 무향으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즉, 화성 지역은 조선 시대에 군사적 요충지이자 무향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충에 향하다 : 충을 향한 지사들의 활동]
화성은 예로부터 뛰어난 무관들이 태어나고 모여들어 활동하는 지역이었다. 이들의 활동과 공적은 이후에까지 이어져 화성 지역을 무향으로서의 특징을 지니게 하였다. 화성 지역의 무관들은 나라를 위한, 또는 국왕을 위한 충(忠)을 바탕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화성 지역의 대표적인 무신 가문이라 할 수 있는 해풍 김씨 남양쌍부파(南洋雙阜派)는 화성 지역에서 8대 무신 또는 10대 무신 집안으로 불리는데, 그중에서도 김우추(金遇秋)의 활약이 돋보인다. 김우추는 무과에 급제한 후, 1583년(선조 16) ‘니탕개의 난(尼蕩介-亂)’을 진압한 공으로 함경북도 병마우후로 임명되었다. 또한 1588년 여진족 33급을 베는 등 16세기 후반 여진족 세력이 활발하던 때 북방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한편,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한명윤(韓明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동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공을 세우고 조방장이 되었다. 1593년(선조 26)에는 상주목사에 임명되어 방어사를 겸하였는데,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사망하였다. 이후 선무원종공신 2등에 봉하여졌고, 이조 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정문리에 한명윤의 충신각이 설치되었다.
화성 지역에는 조선 시대에 공신으로 책봉된 무신들도 다수 있었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도중 사망한 차운혁(車云革)이 대표적이다. 차운혁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다 전사한 공을 인정받아 사후 공신에 녹훈되었다. 지금의 화성시 정남면 괘랑리에 차운혁의 충심을 기리는 충신정려문이 세워졌다. 또 최응일(崔應一)은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공신에 추대되었다. 최응일은 안현전투에서 승리하여 반란군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키며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화성 지역에서는 다양한 활약을 펼친 여러 무관이 활동하였다. 이들의 공적은 후손에 의해 계승되어 화성의 무향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