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2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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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栢龍里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백용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인철 |
개설 시기/일시 | 1914년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백용리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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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구간 | 백용리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백용리 |
성격 | 법정리 |
면적 | 3.20㎢ |
가구수 | 122가구 |
인구[남,여] | 289명[남자 141명, 여자 148명] |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화순군 동면 백용리는 백동(栢洞)·용생(龍生)·신원동 등 3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명칭 유래]
백용리의 지명은 백동 마을의 백(栢)자와 용생 마을의 용(龍)자를 각각 취하였다. 백동 마을은 원래 잣골이라 불렀다. 이는 마을 동북편에 있는 오성산(烏城山)과 관련이 있는 지명으로 성(城)을 재·자·잣이라 부른바 이를 한자로 취하면서 각각 척(尺)·성(城)·백(栢) 등으로 썼다. 이중 잣 백(栢)자를 취하여 백동이라 표기한 것이다. ‘잣골’·‘재골’은 성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용생 마을은 마을 뒷산인 용남산의 이름에서 유래하는데 ‘용’은 산등을 의미하며 ‘남’은 앞쪽을 뜻한다. 산 앞쪽에 위치한 관계로 미르남골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미르’가 용(龍)이 되었고, ‘남’자는 ‘나다’의 날 생(生)자를 각각 취하여 ‘용생’이라 하였다. 뒷산은 이곳에서 용이 나왔다 하여 용남산[용난산]이라 한다. ‘용남’[용이 나옴]과 ‘용생’ 또한 같은 의미이다.
신원동 마을은 조선 시대에 원(院)[여관과 주막을 겸한 집]이 새로 설치되어서 신원이라 부르던 곳이다. 신원은 동복과 화순을 잇는 도로상에 있다.
[형성 및 변천]
1789년 『호구 총수(戶口總數)』에는 화순현(和順縣) 동면(東面)으로 기록되어 있고 1867년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화순현 동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1895년(고종 32)에는 면·결·호수의 다소(多少)에 따라 각 군의 등급을 정하면서 나주부(羅州府) 화순군(和順郡) 동일도면(東一道面)이 되었고 1896년(고종 33)에는 13도 실시에 따라 전라남도 화순군 동일도면이 되었다. 1908년에는 능주군(綾州郡) 원화순방 동일도면이 되었고 1912년 『지방 행정 구역 명칭 일람』에는 능주군 동면 백동(柏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화순군 동면 백용리[용생리·신원동·백동]로 개편되었다.
[자연환경]
백용리는 동면의 서쪽에 위치한다. 북동쪽에서 남서쪽 방향의 산열이 지나고 있으며 북서쪽에서 남동쪽 방향의 골짜기를 따라 국도 22호선이 지나고 있으며 남동쪽의 하방산골 앞쪽으로 들이 펼쳐진다. 백동 마을의 동쪽에는 오성산에서 뻗은 번득지 산등과 새암굴재가 있고 서쪽에는 오성산에서 뻗은 매봉과 송고개가 있다. 마을의 남쪽에는 화순천이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흐르며 북쪽에는 오성산이 있다.
용생 마을의 동남쪽에는 백용 제방과 용포 초등학교가 있고 서쪽에는 화순천이 있다. 마을의 남쪽에는 하방산 굴과 용호 폭포가 있으며 북쪽에는 용남산과 용남산 굴이 있다. 신원동 마을은 동쪽의 앞산과 서쪽의 삼굿배미 충의사·너멍굴이 있으며 남쪽의 안산등과 북쪽의 오성산이 있다.
[현황]
백용리는 2012년 현재 면적 3.20㎢이며, 122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인구는 289명으로 남자는 141명이고 여자는 148명이다. 백용리는 1구의 백동 마을과 2구의 용생 마을·신원동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백용리 동쪽의 언도리, 서쪽의 다지리, 남쪽의 대포리와 동면 농공 단지, 북쪽의 서성리와 화순 전남 대학교 병원을 경계로 하여 접하고 있다.
국도 22호선이 북서쪽에서 남동쪽 방향으로 지나간다. 주산물과 주소득원은 벼이다. 유물 및 유적으로는 영능 참봉 박재풍 시혜 불망비(英陵參奉朴在豊施惠不忘碑), 전 참봉 윤종은 시혜 불망비(前參奉尹琮殷施惠不忘碑), 정삼품 제조 최명구 영세 불망비(正三品提調崔命龜永世不忘碑), 하방사 터, 선돌, 고인돌, 류용진 소장 고문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