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484 |
---|---|
한자 | 綾州牧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희태 |
[정의]
1632년부터 1895년까지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 있던 옛 행정 구역.
[개설]
능주목은 원래 능성현이었으나 1632년(인조 10)에 인헌 왕후 구씨의 성향(姓鄕)이라 하여 목으로 승격되고, 목사가 부임하는 곳이 되었다. 1895년 5월 1일 전국을 23부제(府制)로 개편하면서 부·목·군·현의 고을 등급 구분을 군으로 통일했는데 이때 나주부 능주군이 되면서 능주목의 명칭은 능주군으로 계승되었다.
능주목은 조선 시대 후기에 264년 동안 사용한 고을 명칭이다. 지금의 화순군 능주면·춘양면·청풍면·이양면·한천면·동면이 관할 지역이었고, 치소는 능주면에 있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능주목은 백제 시대 이래 고려 시대~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의 지방 통치 체제 정비에 따라 화순군 능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고을로, 백제 시대에는 이릉부리현, 통일 신라 시대에는 능성군, 고려 시대에 능성현이라 하였다. 조선 시대에도 능성현이라 하다가 인조의 모친인 인헌 왕후 구씨의 성향이라 하여 1632년(인조 10)에 능주목으로 승격되었다.
[관련 기록]
조선 후기의 대표적 관찬 지리지인 『여지도서』 능주 건치 연혁조에 “본래 백제의 이릉부리군이었다. 죽수부리(竹樹夫里) 또는 연주부리(連珠夫里)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인 능성으로 개명되었다. 고려 초에 나주에 속하였고, 인종 21년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조선 태종 16년에 화순현(和順縣)을 합하여 순성현(順城縣)이라 하였으나 얼마 안 있어 각각 전과 같이 복구하였다. 인조 10년에는 인헌 왕후(仁獻王后)의 성향(姓鄕)이라 하여 능주목(綾州牧)으로 높였다. 신사년(辛巳年)[1641]에는 능주 목사(綾州牧使)가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다. 현종(顯宗) 갑진(甲辰)[1664]에는 토포사의 직책을 나주 우영장(羅州右營將)으로 이속(移屬)하였다[本百濟 爾陵夫里郡 一云竹樹夫里 一云連珠夫里 新羅改今名 高麗初屬羅州 仁宗二十一年 置縣令 本朝 太宗十六年 合和順縣 改順城縣 未幾各復舊 仁祖十年 以 仁獻王后姓鄕 陞牧 辛巳 兼討捕使 顯宗 甲辰 移屬羅州右營將]”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인조실록』 권26 5월 경자조에는 “능성현(綾城縣)을 능주목(綾州牧)으로 승격시켰는데, 이는 정희 왕후(貞熹王后) 때의 예를 따른 것이다. 정희 왕후는 파평(坡平) 윤씨인데, 세조가 즉위하자 파산(坡山)을 왕후의 본관이라 하여 현(縣)에서 주(州)로 승격시켰다. 능성은 곧 인헌 왕후(仁獻王后)의 본관이므로 역시 현에서 주로 승격시켰다[陞綾城縣爲綾州牧 用貞熹王后時例也 貞熹王后 坡平尹氏也 及世祖卽位 坡山以王后本貫 陞縣爲州 綾城乃仁獻王后之本貫 亦陞縣爲州]”라는 기록이 나온다.
[내용]
능주목은 1416년(태종 16)에 화순현과 능성현을 합하여 순성현(順城縣)이라 칭할 때, 순성현의 일부가 되어 순성 현령의 관할 하에 있었다. 1418년(태종 18) 순성현이 다시 화순현과 능성현으로 각각 나누어지면서 능성현의 중심지가 되었다. 1594년에는 전란으로 쇄잔한 화순 지역을 합해서 거느리다가 1611년에 다시 분리 되었고, 17세기 인조 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오늘날의 이름인 능주의 명칭을 얻게 되었다.
[변천]
1641년에는 능주 목사가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다가 1664년(현종 5)에는 토포사의 직책을 나주 우영장으로 이속하였다. 1895년 5월 1일 전국이 23부제로 개편되면서 고을의 등급이 군으로 통일되자 나주부 능주군이 되면서 능주목이라는 고을 명칭은 264년 만에 없어졌다.
[의의와 평가]
능주목은 1632년에 승격·개칭된 고을명이지만, 백제 시대 이래 독립된 고을 격을 유지해 왔고, 1895년 지방 제도의 개편 이후에도 ‘능주’라는 이름을 계승하여 존속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