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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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綾州農民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광철 |
설립 시기/일시 | 1926년 4월 - 능주 농민회 능주 노농회에서 분리되어 창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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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칭 시기/일시 | 1929년 4월 - 능주 농민회에서 능주 농민 조합으로 개칭 |
최초 설립지 | 능주 농민회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
성격 | 농민 운동 단체 |
[정의]
1920년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에서 설립되어 활동한 농민 단체.
[변천]
능주 농민회는 1926년 4월 능주 노농회에서 분리되어 창립됐다. 능주 노농회는 1924년 1월에 결성된 단체로 1923년 창립된 화순 소작인 상조회를 제외하고는 화순군에서는 가장 빠른 시기에 조직된 농민·노동자 권익 단체였다.
능주 농민회는 조선 노농 총동맹 아래에 있는 전남 노농 연맹의 소속 단체이기도 했다. 1926년 조선 노농 총동맹이 농민 운동과 노동자 운동을 분리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능주 노농회에서 독립했던 것이다. 같은 시기 능주 노동회가 분리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능주 농민회는 1926년부터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29년 자체 결의로 단체 명칭을 능주 농민 조합으로 변경했다. 능주 농민 조합은 1930년 초까지 활동하다가 해체된 듯하다.
능주 농민회는 창설 당시 능주면의 유일한 농민 운동 단체였다. 동시에 능주 농민회는 능주면 뿐 아니라 세칭 ‘능주 지역’으로 불리는 옛 능주목에 속했던 지역의 농민 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능주 농민회의 영향권은 화순군 면적의 약 45%, 화순군 인구는 50% 정도에 달했다.
당시 능주면 지역은 소작농의 비율이 높은 상황에서 지주의 상당수가 비현지인으로 마름을 통해 소작지를 관리했으며 지세와 각종 공과금을 소작농에게 전담하도록 하는 등 횡포가 심했다. 이런 척박한 소작 관계는 잦은 분쟁을 초래했는데 능주 농민회는 이런 소작농의 처지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능주 농민회는 1927년 여름 가뭄 때 관개용수를 빼앗아가는 지주들을 성토하는 농민 대회를 열었고 가을에는 가뭄으로 수확량이 줄었음에도 전년도와 같은 소작료를 요구하는 일본인 부재지주에 대한 항의 운동을 일으켰다. 또한 같은 해 12월에는 소작권 피박탈자 동맹의 결성과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소작권 피박탈자 동맹은 광주에 사는 부재지주가 소작권을 무단으로 박탈한 데 따라 결성됐는데 농민회는 소작권 피박탈자 동맹과 함께 해당 부재지주와의 교섭을 진행하였다.
능주 농민회는 1929년 4월 능주 농민 조합으로 개칭했다. 농민 조합의 출범 이후에 단체는 좀 더 전국적인 현안과 정치 문제에 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개칭과 동시에 발표한 신간회 지회의 설립에 대한 지지 성명이 그 예였다. 동시에 농민 조합은 영구 소작권의 실현이나 1921년부터 화순군 능주면 주민들이 운영해 온 육영 의숙이라는 사설 교육 기관에 대한 화순군의 지원과 같은 지역 현안에 대한 해결에도 적극 나섰다.
그러던 1929년 5월 메이데이[노동절]를 준비하는 과정 때부터 화순 경찰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어린이날 행사용으로 준비한 선전물을 문제 삼아 노동조합 간부들이 체포되었고 이후에도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다. 1929년 11월에 경찰은 노동조합에 대한 압수 수색을 했고 다시 간부들을 구금했다. 1930년 1월에도 조합장인 조경서를 체포했다. 일련의 탄압을 받으면서 농민 조합의 활동은 봉쇄됐고 실제로 이후 농민 조합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의의와 평가]
능주 농민회와 후신인 능주 노동조합은 1920년대 화순군 농민 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30년 초 능주 노동조합이 일제의 탄압으로 소멸되면서 사실상 화순 지역에서는 이전과 같은 활발하고 공개적인 항일 농민 운동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