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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화순 지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535
한자 朝鮮建國準備委員會和順支部
이칭/별칭 건준 화순지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안종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45년 8월 16일연표보기 -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화순 지부 결성
해체 시기/일시 1945년 10월연표보기 -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화순 지부에서 조선 인민 위원회 화순 지부로 개칭
최초 설립지 건국 준비 위원회 화순지부 - 전남 화순군 화순읍
성격 단체
설립자 주재학|김용규|김학섭|윤병서|조규선|서형윤|조동순|송하진|조옥한|박민기

[정의]

광복 직후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 설립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소속 지부.

[설립 목적]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화순 지부여운형(呂運亨)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의 전라남도 지역 지부 조직이다. 결성 당시 채택한 강령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완전한 독립 국가의 수립’, ‘민주주의 원칙 준수’, ‘치안과 질서 유지’ 등이 설립 목적이었다.

[변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화순 지부는 1945년 8월 16일 화순 국민학교 교실에서 개최된 발기 총회를 통해 결성되었다. 주재학·김용규·김학섭·윤병서·조규선·서형윤·조동순·송하진·조옥한·박민기 등은 광복 전부터 청년 수양회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조선의 독립, 일본인의 비행, 삼남 지방 농민의 강제 이주 정책 등을 토론하곤 했다. 이들은 발기 총회에서 8월 15일 화순 읍내 주재학의 집에서 회합을 갖고 광복 소식과 함께 적산 관리 문제, 치안 유지 문제, 교통 문제, 민족 계몽 운동 등을 논의한 후 다음날인 8월 16일 화순 국민학교에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기로 결의하였다.

화순 지역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의 조직과 기구는 위원장에 김용규, 총무 및 재정 부장에 주재학, 선전 및 섭외 부장에 조규선, 청년 부장에 김현채, 문화 부장에 조주순, 치안 대장에 송화진, 식량 부장에 박민기 등으로 구성하기로 하였다. 이처럼 일시적으로 협의에 의해 결정된 부서는 8월 28일 각 면 대표와 참관인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군민 대회에서 군민들의 박수를 통해 추인됨으로서 군민의 인준을 받는 과정을 거쳤다.

위원장 김용규는 경찰, 사법 서사를 지낸 경력으로 위원장으로 선출된 듯하나 미군정 때 경찰에 피살되었다. 주재학은 일본 유학을 한 부유한 사람이었지만 좌익 운동과 관련해 투옥 경험이 있었고 광복 후에도 투옥되는 경험이 있었다. 조규선은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출신으로 해방 후 진보당 혁신당 운동을 전개했고, 김현채 역시 일본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었다. 조주순은 능주면의 지주 출신으로 후쿠오카 의대[福岡醫大]를 중퇴한 후 일본에서 사회 운동에 관계하다 귀국한 후 구속된 바 있으며 해방 당시에도 감옥에 있었다. 송화진은 광주 농업 학교를 졸업하고 농민 운동에 관여한 인사였으며, 박민기는 소농으로 우익적 인사였다.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화순 지부는 1945년 10월 초 박헌영의 조직 선에 들어 있던 조주순 등을 통해 중앙으로부터 개편 지시를 받고 인민 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이미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의 좌경적 분위기에 동조하지 않는 박민기 등의 우익적 인사들이 탈퇴함으로서 인민 위원회는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구성원에 비해 보다 이념적으로 좌익 이념을 가진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인민 위원장도 김용규 대신 사회주의 운동에 관여해 온 주재학이 선임되었다. 그 외 군내 좌파의 핵심을 이루어온 조주순·조규선·김현채·송화진 등이 간부진을 구성하였고 서형윤·김용초·조동순·조병갑이 신규 위원으로 충원되었다.

화순 지역은 전라남도의 다른 시군과 달리 남한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인 화순 탄광이 있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화순 인민 위원회는 탄광 노동자들의 활동에 큰 도움을 받고 있었다. 화순 탄광동면에 소재하고 있었는데 동면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인민 위원회 위원장은 면장을 오랫동안 역임해 왔던 조기련이었고 부위원장은 심상기였다.

동복면에서도 하달태를 중심으로 한 인민 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하달태는 일본 히로시마 고등 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과 토호쿠 제국 대학[東北帝國大學]를 거쳐, 한때 사상운동에 관여한 바 있었고 면민들의 상당한 신망을 얻고 있었다. 하달태는 일제하의 탄압에 의해 몇 차례 좌절을 겪은 후 해방 전 1944년 7월 13일 학벌을 중시했던 당시의 동복 면장 오건기의 발탁으로 부면장에 임명되었다.

해방 직후 동복 인민 위원회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그동안 하달태를 추종한 면 직원들과 농민·노동자를 규합하여 광범한 반 지주 세력을 형성하고 치안권을 장악하는 일이었다. 이 일은 화순 탄광 노동자와 능주 청년대의 지원 하에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옥태가 보안 대장으로 임명되어 동복면의 치안 유지를 전담했고 하달태 자신은 더 이상 면장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 거대 지주 오건기를 대신하여 1946년 1월 24일까지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한 모든 행정 업무를 총괄하였다. 이로 인해 동복면의 모든 행정과 치안 업무는 완전히 인민 위원회 세력이 장악할 수 있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화순 지부는 강령에 맞게 치안 회복과 질서 유지, 식량 조사와 대책 수립 등의 행정 공백을 메우기 위한 활동에 주력하였으며, 더불어 관내 각 지역의 지부 조직 확대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자주적 독립 국가의 수립에 진력하였다.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화순 지부에는 여러 가지 소속 기관들이 결성되었으나 면·리 단위에 지부가 결성되었다는 기록과 증언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치안 부문에 있어서 활동이 두드러졌으며, 10월 초 인민 위원회로 개편된 이후 동복면에 면 단위 인민 위원회가 만들어져 활발한 활동을 한 경향을 찾아볼 때 각 면에서도 자발적 인민 위원회 활동이 전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의와 평가]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화순 지부는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에서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시민들의 자발적인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미군이 진주하기 이전부터 항일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행정이나 치안 유지 등을 담당한 것이나 단기간에 인민 위원회로의 발전적 전환을 이루어낸 점은 그 역량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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