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8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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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甘道里昌寧曺氏集姓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감도리 하만골 |
집필자 | 최성은 |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감도리에 있는 창녕 조씨 집성촌.
[명칭 유래]
감도리는 감한리와 도방동 마을의 지명을 한자씩 취하여 감도리라 하였다. 하만골의 옛 이름은 감한리이다. 감한리는 감한사라는 절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형성 및 변천]
창녕 조씨 판윤공파 감도리 입향조인 조수성(曺守誠)[1570~1644]은 화순현 녹구리[현 화순군 화순읍 삼천리]에 거주하다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질 조엽(曺熀)[1600~1665]과 읍내 사람 최명해[1607~1650], 임시태, 유함 등과 더불어 창의하여 의병 도대장으로 추대되고 격문을 사방에 돌려 군량을 모집하였다. 한림 양만용, 옥과 현감 이흥발 형제, 순창 군수 최온 등과 더불어 여산에 모여 남한산성을 향하던 중 청주에 이르렀을 때 인조가 청나라에 화의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려를 해산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세상일을 끊고 하만골로 입향 정착하였는데 참판 김반[1580~1640]이 천거하여 헌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하만골을 중심으로 조수성을 입향조로 하여 세거하는 창녕 조씨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조정유(曺挺有)[1611~1650]는 조수성의 손자이며 부호군을 지낸 조욱(曺煜)[1592~1672]의 아들로, 선교랑을 역임하였다. 학문이 정밀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독실하여 나이가 들어 더욱 이름과 행동에 힘썼다. 조선휘(曺善徽)[1647~1700]는 입향조 조수성의 증손자이며 조정우(曺挺右)[1612~1649]의 아들이다. 1693년 문과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거쳐 장연 현감을 역임하였다. 조영진(曺瑛振)[1766~1815]은 조수성의 6세손이며 조윤철(曺允哲)[1721~1780]의 아들로, 1810년에 생원에 급제하였다. 조기선(曺基宣)[1890~1963]은 조수성의 11대손이며 호는 죽하(竹下)이다. 화순군 서면 면장을 역임하고 화순 향교 도유사를 지냈다. 조국현(曺國鉉)[1896~1969]은 조수성의 12대손이며 호는 남리(南里)이다. 1919년 3월 화순면 갱무산에서 만세 운동을 주창하였으며,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다..
[자연환경]
하만골 동쪽으로 덕음산, 불당골, 서쪽으로 법석골, 도방골, 남쪽으로 솔개재, 북쪽으로 한식골재가 있다. 마을의 방향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현황]
2013년 현재 40가구 73명의 창녕 조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1996년 화순읍 다지리에 있는 지곡 서원(智谷書院)에 입향조 조수성과 함께 조흡(曺恰)[1401~?], 조대중(曺大中)[1549~1590], 조수홍(曺守弘)[1574~1608], 조엽을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