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8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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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政里綾城具氏集姓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정리 정동 |
집필자 | 최성은 |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정리에 있는 능성 구씨 집성촌.
[명칭 유래]
정동 마을은 고려 때 능성 구씨 구민첨(具民瞻)이 평장사를 지냈는데, 봉분이 이곳에 조성된 후 그의 관명을 따라 정승골이라 했는데 후에 정동으로 줄여서 부르게 되었다.
[형성 및 변천]
구선(具善)[1550~1615]을 입향조로 하여 세대를 이어오는 한천면 정리의 능성 구씨 집성촌이다. 1570년(선조 3) 무렵 구선이 현 춘양면 용곡리 통안 마을에서 시조의 묘가 있는 정동으로 입향하여 정착하였다.
구두남(具斗南)의 자는 일지(一之)이고 호는 오봉(五峰)이다. 생원 구정(具綎)의 아들이다. 경사를 두루 섭렵하여 문장이 참연하였다. 퇴계 이황(李滉), 낙촌 박충원(朴忠元)[1507~1581]과 함께 1528년(중종 23)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도의에 대해 서로 뜻이 맞았다. 효행으로 천거되어 공릉 참봉(恭陵參奉)·경릉 참봉(景陵參奉)을 거쳐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를 지냈다.
구방경(具方慶)의 자는 인기(仁基)이고 구두남의 아들이다. 1560년(명종 15)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정랑, 용담 현령, 사헌부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구희(具喜)[1552~1593]의 자는 신숙(愼叔)이고 호는 청계(淸溪)이며, 구두남의 손자이다. 임진왜란 때 고경명(高敬命)의 의병에 가담하였고, 진주성 싸움에 참가하여 성이 함락되자 강물에 투신자살하였다. 1625년(인조 3) 군기시 주부에 추증되어 숙종 때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1860년(철종 11) 임금의 명으로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에 배향되었다.
구삼익(具三益)[1653~?]의 자는 익부(益夫)이고 호는 주봉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행동이 정직하고 은원이 엄정하였다. 마음에 없는 행동을 즐겨하지 않았다. 문장을 발휘하여 일세의 사표가 되었다. 1683년(숙종 9)에 진사가 되었다. 연주산 아래에 서당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니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능주 향교와 전라도에서 여러 번 천거하였다.
구자의 자는 군현이고 호는 백인당이다. 품성이 너그럽고 중후하여 학업이 흥성하여 일시에 법도를 드러내었다. 자기 문하에서 글을 읽는 선비들과 고금의 일에 대하여 읊고 거문고를 타며 스스로 즐겼다.
[자연환경]
정동 마을은 북쪽으로 매봉산을 뒷산으로 하는데 이곳에 구민첨의 묘가 있다. 동쪽으로 두루봉[노적봉]이 있으며 큰고랑과 작수골, 개먹골이 있다. 서쪽으로 홈거리와 장구배미가 있고 그 너머로 안산과 연주산이 있다. 서북쪽으로는 정동제 저수지가 있고 그 위로 민재가 있다. 남쪽으로는 재를 넘으면 모산리에 이른다.
[현황]
2013년 현재 13가구 18명이 능성 구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1780년(정조 4)에 초창하였다가 폐한 후 1973년에 신축한 영모재는 능성 구씨 시조 구존유(具存裕)를 향사하는 재각이다. 1875년에 세워진 구희와 구석유의 정려인 충효문이 있다. 1980년에 건립한 고려 중대광 동평장사 능성 구공 신도비와 1940년에 건립한 수문장 청암 구공 석유 비가 있으며 광흥창 봉사 오봉 구공 두남 비와 1940년에 건립한 선교랑 군자감 주부 청계 구공 희 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