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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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希聖 |
이칭/별칭 | 면부(勉夫),일심재(一心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수용 |
출생 시기/일시 | 1558년 - 장희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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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08년 - 장희성 만경 현령으로 좌천 |
활동 시기/일시 | 1608년경 - 장희성 사직, 일심재 은거 |
몰년 시기/일시 | 1613년 - 장희성 사망 |
출생지 | 장희성 출생지 - 충청남도 공주 유구리 |
거주|이주지 | 일심재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일심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흥덕(興德) |
대표 관직 | 만경 현령 |
[정의]
조선 후기 화순 지역에 입향한 문신.
[가계]
본관은 흥덕(興德). 자는 면부(勉夫), 호는 일심재(一心齋). 안경공(安敬公) 장연우(張延祐)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사직(司直) 장몽량(張夢良)이며 부인은 보성 선씨(寶城宣氏)이다.
[활동 사항]
장희성(張希聖)[1558~1613] 충청도 공주(公州) 유구리(維鳩里)에서 출생하였으며, 천성이 강직하고 바르며 재주가 명민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성 전투에서 군민이 몰사하자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러주었다.
이순신(李舜臣)이 군량미 운송 책임자로 임명하였으며, 천거에 의해 희릉 참봉(僖陵參奉)이 되었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603년(선조 3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6년(선조 39)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와 성균관 학유를 지냈다. 1608년 광해군의 경연(經筵)에 참여하였는데 간신들의 탄핵 상소에 의해 만경 현령(萬頃縣令)으로 좌천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탄식하길, “내가 어찌 닷 말의 녹봉 때문에 국모가 없는 나라에서 벼슬하리오.”라고 하고, 마침내 사직하고 화순으로 낙향하여 일심재(一心齋)를 짓고 은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