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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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羅景績 |
이칭/별칭 | 중집(仲集),석당(石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안동교 |
출생 시기/일시 | 1690년 - 나경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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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59년 - 나경적 홍대용과 혼천의에 관해 논의 |
몰년 시기/일시 | 1762년 - 나경적 사망 |
출생지 | 나경적 출생지 -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금송리 자인동 |
거주|이주지 | 나경적 이주지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
묘소|단소 | 나경적 묘소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당산(堂山) |
성격 | 문인|실학자|천문학자 |
성별 | 남 |
본관 | 금성(錦城) |
[정의]
조선 후기 화순 출신의 실학자.
[가계]
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중집(仲集), 호는 석당(石塘). 이조 참판 나빈(羅彬)의 8세손이요, 나무계(羅茂桂)의 현손이며 생부는 나재우(羅載祐)로 나재홍(羅載弘)에 입양하였다.
[활동 사항]
나경적(羅景績)[1690~1762]은 효우가 지극하고 학식이 고명했으며 친족을 화목하게 대하여 향리에서 칭송을 받았다. 김창흡(金昌翕)·조정만(趙正萬)과 시를 주고받아 늘 인정을 받았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를 석당 처사(石塘處士)라고 불렀다.
명물 도수(名物度數)의 학문에 관심이 많아 혼천의(渾天儀)·자명종(自鳴鐘)·자용침(自舂砧)·자전마(自轉磨)·자전수차(自轉水車) 등을 발명했으나 그 제작 방법은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1759년 가을에 실학자로 알려진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이 찾아와 천문학과 혼천의 등에 관해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 홍대용은 나경적을 나주로 초빙하여 아버지 홍륵(洪櫟)의 후원 하에 철제(鐵製) 혼천의를 제작하여 자신의 사설 천문대인 농수각(籠水閣)에 설치하고 천문을 깊이 있게 연구하였다.
홍대용과의 인연으로 나경적은 사후에 중국에까지 명성이 알려졌다. 중국인 반정균(潘庭筠)은 그를 정주(程朱)의 무리라고 일컬었고, 육비(陸飛)는 「농수각기(籠水閣記)」를 지었으며, 엄성(嚴誠)도 나경적의 높은 재주를 썩게 나둬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나경적이 어떤 계기로 실학풍에 접속하게 되었는지, 어떤 실학 서적을 탐구했는지, 누구와 함께 실학적 사고를 구현해 갔는지, 어떤 실학 저술을 남겼는지를 알려주는 구체적인 정보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있다. 그의 제자로는 안처인(安處仁)·염영서(廉永瑞) 등이 있다.
[학문과 저술]
『석당 유고(石塘遺稿)』 초고가 집안에 보관되어왔으나 중간에 분실되었다.
[묘소]
묘소는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당산(堂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