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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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好敏 |
이칭/별칭 | 사명(士明),아산(鵝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안동교 |
출생 시기/일시 | 1598년 - 정호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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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46년 - 정호민 생원시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678년 - 정호민 사망 |
출생지 | 정호민 출생지 - 전라남도 화순군 |
강학지 | 정호민 강학지대명재(大明齋) -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백아산(白鵝山)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창원(昌原) |
[정의]
조선 후기 화순 출신의 문인.
[가계]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명(士明), 호는 아산(鵝山). 판결사 정인례(丁仁禮)의 8세손이며, 정인남(丁仁男)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성주 형씨(星州邢氏) 형관(刑寬)의 딸이다.
[활동 사항]
정호민(丁好敏)[1598~1678]은 어려서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통독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수성(曺守誠) 등의 격문에 동조하여 이흥발(李興浡)·최온(崔蘊) 등과 합병하여 북진하였다. 청주(淸州) 서평원(西平原)에서 적을 만나 격전을 벌이고 북진하던 중, 화의(和議)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귀향하였다.
1646년(인조 24)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을 단념하고 백아산(白鵝山)에 은거하였다. 이곳에 대명재(大明齋)를 짓고 사우(士友)들과 예(禮)를 강론하며 세상을 마쳤다. 후인들이 그 거처를 강례동(講禮洞)이라고 불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아산 실록(鵝山實錄)』 2권 1책을 남겼는데, 기정진(奇正鎭)의 발문을 받아 1855년에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