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10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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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慶雲 |
이칭/별칭 | 선장(善章),삼천(三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만호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최경운 의병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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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597년 - 최경운 사망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 |
[정의]
조선 후기 정유재란 때 순절한 화순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장(善章), 호는 삼천(三川). 고려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16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증(贈) 승지(承旨)인 최윤범(崔尹範)이고, 아버지는 증(贈) 영의정(領議政) 최천부(崔天符)이다.
[활동 사항]
최경운(崔慶雲)[?~1596]은 아우인 최경장(崔慶長),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양응정(梁應鼎)과 기대승(奇大升)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7년(명종 22)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590년(선조 23) 어머니 임씨(林氏)의 복상 중인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고경명(高敬命), 박광옥(朴光玉) 등과 함께 왜군에 대항하는 일을 편지로 논의하였다. 이후 두 동생과 논의하여 의병청을 삼천리(三川里)에 설치하고 도내에 격문을 보내 병사와 전마(戰馬), 군량을 갖추었다. 상중(喪中)이었기 때문에 아들 최홍재(崔弘宰)를 보내 금산(錦山)에 있는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의병진에 나아가도록 했다. 하지만 고경명이 이미 죽은 후였기 때문에 돌아왔다. 고경명의 휘하에 있던 문홍헌(文弘獻) 등이 남은 병력을 모아 화순으로 복귀했는데, 이때 동생 최경회(崔慶會)에게 의병장이 되어 줄 것을 청하였다.
이후 최경회가 진주성 전투에서 목숨을 잃자, 동생인 최경장(崔慶長)에게 거의(擧義)할 것을 권하여 최경장은 사천(泗川), 고성(固城) 등지를 방어하였다. 아들 최홍재를 시켜 초유사(招諭使)의 명을 받아 개성(開城)으로 가게 하였고, 조카인 최홍우(崔弘宇), 최홍기(崔弘器) 등에게도 의병으로 참여하게 했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발발했는데, 최경운은 고을 사람 500여 명과 함께 오성산성(烏城山城)을 지켰다. 이때에는 중과부적으로 왜군의 공격을 끝내 막아내지 못하고 사로잡혔는데, 왜군을 끝까지 꾸짖다가 결국 목숨을 잃었다.
[상훈과 추모]
1782년(정조 6)에 명장(名將)의 고적(古蹟)을 그림으로 그려 올리도록 명하였을 때 화순 현감 박명순이 「오성산 최경운 전망 유허도(烏城山崔慶雲戰亡遺墟圖)」를 올렸다. 후에 삼충사(三忠祠)를 세워 그를 기리고 있다. 또 진사 최경운 유허비(進士崔慶雲遺墟碑)가 화순 오성산에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