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1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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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代敎育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덕진 |
[정의]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 개항기부터 해방 이전까지 이루어진 근대식 교육.
[개설]
1880년대부터 1945년 광복까지를 뜻하는 근대 시기의 교육은 국민 국가의 성립과 자본주의 발생에 따른 계몽주의 교육을 뜻한다. 일제에 의한 강점으로 인해 화순 지역에서는 근대 교육에 대한 적극적 태도를 취하기 어려웠지만 능주 육영 보통학교를 비롯한 12개의 보통학교와 10개의 간이 학교 및 청년회 활동과 야학을 통해 근대식 교육이 실시되었다.
[개항기]
갑오개혁 이후 1895년 고종 황제의 ‘교육 조서’에 따라 실용과 과학적 학문을 신교육으로 명시하면서 여러 교육 제도와 체제가 도입되었다. 따라서 화순 지역에서 최초의 근대식 학교로 1908년 능주 육영 보통학교[능주 초등학교]와 1909년 사립 동진 학교[동복 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능주 육영 보통학교는 능주 군수 민상현의 발의로 능주군 주내면에 설립되었고, 사립 동진 학교는 동복군 의회를 중심으로 향교의 향교답 등을 받고 지역민의 기부를 받아 설립되어 근대 교육을 실시하였다.
[일제 강점기]
1910년 한일 병탄 이후 일제는 「조선 교육령」, 「사립 학교 규칙」, 「서당 규칙」, 「보통학교 규칙」 등을 공포하면서 민족 운동을 전개했던 사립 학교를 탄압하고, 일본인 교원을 배치하여 조선인을 일본의 신민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화순 지역에서는 1917년 화순 공립 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3·1 운동 이후 일제가 우리 민족을 회유하기 위해 ‘문화 정치’를 실시하고,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자 각지에서 청년회가 조직되었다. 화순에서도 화순 청년회, 능주 청년회, 능주 갑자 청년회, 능주 노농 청년회, 외남 청년회, 동복 청년회, 동명 청년회 등이 조직되었다. 화순 청년회는 무산 아동을 대상으로 학습 강습소를 설치하여 가르쳤으며, 능주 청년회는 교육·산업·경제·농촌 개량·한국사 등을 주제로 강연회와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능주 갑자 청년회는 부녀 야학을 설립하였고, 외남 청년회는 영명 의숙을 운영하였으며, 능주 노농 청년회와 동복 청년회는 야학을 운영하였다.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청년회는 연합 조직이 생기면서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하면서, 화순 청년 동맹 능주 지부에서는 한글 강좌 및 부녀자와 농민을 대상으로 야학을 개설하였다.
이 외에도 1920년대에는 화순에 많은 공립 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즉 1920년 이양 공립 보통학교를 시작으로, 아산 공립 보통학교, 천태 공립 보통학교, 동면 공립 보통학교, 이서 공립 보통학교, 춘양 공립 보통학교, 청풍 공립 보통학교, 도암 공립 보통학교가 세워졌다. 이들 학생들은 일본인 교장의 부임과 일본어 교육 강요에 대해 동맹 휴학으로 저항하였다. 1921년 화순 공립 보통학교 학생은 동맹 휴학을 하였고, 1926년 천태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도 동맹 휴학을 하였다.
또한 민족 실력 양성 운동으로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보통학교의 설립과 청년회 등을 중심으로 한 야학을 통해 화순 지역 아동들도 근대 교육을 받을 기회가 늘어나 문맹률 감소, 여성의 지위 향상,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의 성장 등이 이루어졌다.
1934년 교육 시설의 부족으로 조선 총독부에 의해 「간이 학교 설치에 대한 통첩」이 공포되면서 간이 학교가 설립되었다. 간이 학교란 학교에 취학하지 못한 조선인 아동에게 초등 교과 과정을 2년 동안에 마치도록 한 학교이다. 보통학교에 부설된 속성 초등학교로, 대체로 일본어 교육을 목적으로 하였다. 화순 지역의 간이 학교는 1934년 주산 간이 학교를 선두로 하여 월곡 간이 학교, 금전 간이 학교, 복암 간이 학교, 서유 간이 학교, 월산 간이 학교, 도암 간이 학교, 도장 간이 학교 등이 설치되었지만 광복 직전 거의 폐교되거나 국민학교로 전환되었다.
1938년 2차 「조선 교육령」은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 아래 각급 학교의 명칭을 일본인의 것과 같이 하였다. 1943년에는 초등학교의 의무 교육제를 실시하면서 군사 훈련을 하는 등 교육을 전시 체제에 이용하였다. 학교를 다니던 젊은 학생들은 학도병(學徒兵)으로 끌려가 전쟁에 투입되었다.
[의의와 평가]
개항기나 일제 강점기의 근대 교육은 화순 지역민의 기여로 이루어졌다. 학교를 설립하거나 운영할 때 지역민의 협조는 필연적이었고, 야학 등의 운영도 지역민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의 어려웠던 사회·경제적 상황에서도 화순 지역민들의 교육에 대한 열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