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A02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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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야사 마을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지용 |
조선후기 | 1810년 - 하백원이 오늘날 양수기라 할 수 있는 자동농수기계장치인 자승차를 발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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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 1810년 - 하백원이 조선후기 백리척으로 전국지도인 〈동국전도〉를 제작하였다. |
조선후기 | 1821년 - 하백원이 세계지도인 〈태서회사이마두만국전도〉를 제작하였다. |
현대 | 2004년 - 2004년 12월10일 화순군민회관에서 ‘규남 하백원 선생 실학사상 학술대회’ 가 개최 되었다. |
현대 | 2005년 - 2005년 5월 국립중앙과학관에서는 하백원의 『자승차도해』에 근거하여 자승차를 복원하는데 성공하였다. |
마을지 | 규남 박물관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164번지 |
[200여년 만에 다시 만난 하백원]
2004년 12월 10일 화순군민 회관에서는 호남 4대 실학자로 꼽히는 야사 마을 출신 규남 하백원 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규남 하백원 선생 실학사상 학술대회’가 열렸다. 화순군이 후원하고 전남사학회가 주최하여 열린 학술 대회에서는 규남 선생의 학문과 예술, 자승차(自升車), 「동국지도」와 「만국 전도」, 규남 선생의 사상과 유적의 활용 방안 등을 주제로 발표와 함께 열띤 토론의 장이 펼쳐졌다.
역사, 철학, 지리학 분야의 학자들이 모인 이 자리는 하백원 선생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후손 하성래, 하상래 형제의 끊임없는 노력이 만들어낸 자리라 할 수 있다. 하상래 씨는 2002년 조선 대학교 이종범 교수의 ‘호남 실학자 규남 하백원’을 주제로 한 기고문을 읽고 선조인 하백원 선생의 업적을 보다 넓은 세상에 알릴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면서 이날의 학술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4년 봄 공주대학교 전남사학회 이해준 교수의 소개로 국립중앙과학관 정동찬 연구실장을 만나 『자승차도해』를 보이게 되었다.
“대전시청에 있는 커피숍에서 정동찬 연구실장을 만났어요. 그리고 『자승차도해』를 보여줬는데 정동찬 연구실장이 ‘조선시대 자동장치 가운데 설계도가 남아 있는 것은 몇 개 없습니다. 복원해 봅시다.’ 라고 하면서 자승차 복원 연구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더라니까요. 우리로선 반가운 말이고 국가에서 복원한다고 하니까 좋았죠. 그리고 바로 연구가 시작되었어요.”(하성래, 하상래)
“조선 시대에 주로 사용된 양수기는 사람이 발로 밟아 돌리는 것이었지만 하백원의 자승차는 사람의 힘이 아닌 강물을 이용하여 자동으로 움직이는 양수기라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인 발상이죠.”(『동아사이언스』)
2005년 5월 복원에 성공한 자승차는 국립 중앙 과학관에서 공개되었다. 그리고 현재 국립 중앙 과학관에서 보관중이며 이후 후손들의 요청으로 2009년 두 번째 자승차가 만들어져 현재 야사 마을 규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가뭄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과학적 사고의 산물, 자승차]
하백원은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인 1810년 오늘날 양수기라 할 수 있는 자동기계장치인 ‘자승차(自升車)’를 발명하여 가뭄에 시달리던 농촌의 물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자승차도해(自升車圖解)』에서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기구는 매우 졸렬하여 사람이나 가축의 힘을 빌려야 한다. 그러므로 곧바로 피로하여 그만 두게 된다. 땅이 비옥한데도 열흘만 비가 오지 않으면 높은 지대의 곡식이 말라 죽을까 근심하게 된다.’라고 하며 당시 농업기술의 열악함에 대해 지적하였다. 당시에도 분명 다양한 수차는 존재하였지만 농민들은 수차를 제작할 여유가 없어 널리 쓰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주변에 냇물이나 강이 있어도 조금이라도 높이가 낮으면 활용하지 못하고 마냥 바라보거나 물을 길러 나를 수밖에 없던 형편이었다.
야사 마을의 지세도 이와 같았으며 하백원은 자승차를 제작하며, ‘비가 오지 않아 높은 지대의 곡식이 말라 죽고 흉년이 들기 때문에 이를 활용토록 하여 밤낮으로 물을 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자승차를 연구하고 발명하게 되었음을 밝혔다.
당시 지형적 조건으로 물 공급에 어려움을 겪었던 지역에 물을 효율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방안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는 ‘용골차’, ‘무자위’, ‘맞두레’, ‘용두레’, ‘물풍구’ 등 다양한 양수도구의 제작으로 나타났다.
하백원은 자신이 나고 자란 야사 마을에서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해 과학적 사고의 실천과 대민 구휼의 의지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전라도 작은 산골 마을에서 세계를 바라보며]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1811년 백리척으로 아름답고 조화로운 모습의 우리나라의 지도가 화순군 작은 산골 마을에서 제작되었다. 바로 하백원 선생의 우리나라 전도 「동국지도」와 1821년 제작된 세계지도 「만국 전도」가 바로 그것이다.
야사 마을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앞산에 올라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외에는 인근 마을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산골 마을에서 하백원 선생은 우리나라 전도인 「동국지도」와 함께 세계 지도인 「만국 전도」까지 제작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하백원 선생의 사고는 당시 일반적인 이들의 시각과는 확연하게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하백원 선생의 현실 의식과 실용적 학문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반성의 자세는 다양한 발명품과 더불어 지도 제작에 대한 뜻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나라 전체와 전 세계를 바라보고자 하는 의지로 이어져 갔으며, 두 지도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동국지도」와 「만국 전도」는 1980년 4월 『전남 일보』 기획 시리즈 「〈야인(野人)〉-난세를 밝힌 등불: 하백원편-」에서 소개가 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초, 후손으로서 선조의 유물에 대한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하성래 씨는 「동국지도」와 「만국 전도」를 규장각에 기증하려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생 하상래 씨는 이를 본인이 직접 소장하기를 청하였다. 이후 지리학자 양보경 씨의 연구가 진행되었고, 2004년 12월 학술대회에서 「규남 하백원의 동국전도와 만국 전도」라는 주제로 발표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백원의 「동국지도」와 「만국 전도」는 2005년 12월 27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제 제285가 되었고, 지금은 전라도 산골 야사 마을 규남 박물관 전시실 유리관 속에서 생생하게 역사를 전하며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