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C010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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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도장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옥희 |
김재탁 진사시험에 합격 | 1827년 - 김재탁이 52세의 나이로 진시시험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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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정 재건축 | 1922년 - 김재탁의 후손 김종환이 백파정을 재건축하였다. |
백파정 백일장대회 | 1970년 경 - 진주김씨 문중인 해망장학회에서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글짓기와 그림그리기 대회를 개최하였다. |
마을지 | 백파정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독무지기 뒷산기슭 |
마을지 | 김종환의 옛집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독무지기길 7-4 |
[절벽에 자리 잡은 백파정의 풍취]
도장 마을 뒷산기슭 절벽에 위치한 백파정(白波亭)은 김재탁(金再鐸)[1776~?]이 띠집을 지어놓고 소요하던 곳이다. 독무지길 뒤편에 있는 뒷산 자락에서 대밭을 따라 50여 미터를 오르면 오솔길 사이로 백파정의 아름다운 처마가 시야에 들어온다. 백파정 뒤는 암벽이 자리하고 있고 건물 아래에는 정천의 물줄기가 흘러간다. 백파정 주변으로는 노송 몇 그루가 서 있어 운치를 살려준다. 백파정 앞에 서면 도장 마을의 집들이 눈에 들어오고 마을의 논과 밭도 펼쳐진다.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며 풍취를 즐기기에 적당한 장소이면서 농사일도 살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백파정은 단층의 팔작지붕 평기와 건물이며 정면 2칸, 측면 2칸의 중재실 구조이다. 처마 아래에는 ‘白波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호남의 명필인 설주 송운회[1874~1968]의 글씨이다. 보성 출신의 설주 선생은 당대의 명필로 “보성 강물이 송설주 붓 씻은 물 때문에 먹물이 되었다”는 말이 전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였던 인물이다. 크지 않은 누정 곳곳에는 문사들의 현판과 시문이 빼곡히 걸려있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만도 31편이다. 그만큼 여러 문인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사 벼슬을 한 김재탁의 권세]
백파정을 처음 세운 김재탁은 도장 마을 진주 김씨 김응복(金應福)의 아들로 자는 맹경이며 호는 백파정이다. 학문이 높아서 1827년 조선 순조 때 52세의 나이로 과거에 응시해 2등을 했다. 이 때 마을에서는 큰 잔치를 벌였다는 말이 전한다.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지만 사양하고 고향에 머물며 학문 활동을 했다고 한다. 후손들은 김재탁을 진사공이라고 부른다. 진사공의 권세에 대해서 후손들에게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진사공 그 양반이 아버지 묘를 무지기에 썼어요. 무지기라고 하는 데가 위험해서 갈 수가 없어. 무지기가 여그서 한 10㎞ 되요. 올라가는 데가 아주 험악하거든요. 마고할미가 목욕한 데도 있고. 올라 갈라면 아주 험악해요. 거기까지 운상을 할 때 상여를 맨 사람들이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생각이 돼요. 권세를 부렸은께 거그다 묘를 썼다고 생각돼요. 그곳을 지금도 진사등이라고 불러요.” (김범순)
도장 마을에서 10㎞[25리]나 떨어진 아주 험한 산중턱에 부친의 묘를 쓸 정도로 진사공의 권세는 대단했던 모양이다. 김재탁 선생이 마을 뒷산에 백파정을 건립하니 수많은 문사들이 이곳을 찾아와 교유를 나누었다고 한다. 김재탁은 백파정을 짓고 난 감회를 다음과 같은 글로 남겨 놓았다.
「백파정을 짓고서[白波亭原韻]」
"푸른 바다 누런 물결 동으로 흐르고
냇가에 그득한 물결 바람에 일렁이네
학은 구름 속의 맑은 하늘에서 오고
해오라기는 갈대꽃 달빛 속에 서 있네
넓고 깨끗한 이 땅은 천년토록 빛나고
백리 들판 고루 내린 비 해마다 풍년일세
정자는 풍경처럼 공중에 떠 있고
거울 같은 정경속에 주인만 앉았어라."
백파정에서 바라다 보이는 풍경을 아름답게 묘사하면서 이러한 평화로운 모습이 천년토록 지속되기를 기원하는 백파정 선생의 염원이 담겨있는 글이다.
백파정을 찾은 광주 목사 조운명(趙雲明, 1768)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놓았다.
「백파정을 읊다[白波亭韻]」
"물결 위의 제비는 무심히 날고[洋燕無心]
나물 캐는 사람은 말이 없네[采永言不]
개울 건너니 거문고와 책이로구나[度溪琴書]
스스로 기꺼워 즐기며 기록하니[聊自樂記]
국화향기 그윽하게 머금었구나[菊足函捿]"
광주 목사를 역임했던 조운명과 김재탁은 같은 시대를 산 인물로서 교유가 깊었던 모양이다. 조운명은 시를 통해 백파정을 찾은 소회를 노래하고 있다. 근심도 없이, 욕심도 없이, 아름다운 산수에서 책 읽고 거문고를 타며 은거의 삶을 살고 있는 주인을 칭송하고 있는 내용이다.
[쇠락한 정자를 후손이 다시 일으키다]
시간이 지나 건물이 쇠락해지니 1922년에 그의 후손 김종환이 누정을 재건축하였다. 김종환 집은 백파정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백파정에 과객들이 찾아오면 이 집에서 음식을 해서 정자까지 날랐다고 한다. 김종환은 많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기 때문에 살림이 넉넉해서 종종 지역의 유지들이 김종환을 찾아와서 교유를 나누었다. 1943년에는 화순군수가 백파정에 머무른 적도 있었다.
백파정은 진주 김씨 후손들의 공부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고 초군들이 잠시 비를 피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김재탁의 5대 후손인 김종옥 씨는 소학교 시절, 동무들과 함께 백파정에서 잠을 자며 숙제를 하고 공부를 했다고 한다. 또 다른 후손인 김성인 씨는 초등학교 시절에 진주 김씨 후손들이 조직한 해망 장학회에서 주관했던 백일장을 이곳에서 열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거그서 우리 어렸을 때 백일장도 하고 그랬어요. 초등학생들 데리고 백일장하고 그림 그리기 하고 말하자면 사생 대회제. 해망 장학회라고 우리 문중에서 만든 장학회가 있어. 우리 마을의 애기들을 데리고 했어. 그때는 마을에 애기들이 많았은께.”(김성인)
마을에 사는 초등학생들을 백파정에 모아놓고 자체적으로 백일장 대회를 열만큼 도장 마을의 학문적 분위기는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진주 김씨 후손들에게도 마을 사람들에게도 의미 있는 공간이었던 백파정은 100년이 넘도록 도장 마을 마을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근대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백파정이 하루빨리 문화재로 등재되어 적절한 보호 조치를 받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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