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4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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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음역 | Goryeo Sidae |
영어의미역 | Goryeo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구완회 |
[정의]
918년에서 1392년까지 고려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충청북도 제천 지역의 역사.
[개설]
고려 시대 제천 지역은 내제군(奈堤郡)에서 제주(堤州)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1세기에는 원주목과 충주목으로 갈라져서 속하게 되었다. 고려 시대 잦은 외세의 침입은 제천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충주와 제천 사이 지역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행정 구역 개편]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내제군을 제주로 바꾸고, 별호는 의천(義川) 또는 의원(義原)이라고 했다. 당시 청풍현은 제주의 영현(領縣)이었다. 처음 제천은 중원도(中原道)에 속하였으나, 오도 양계(五道兩界)로 나누게 되자 양광도(楊廣道)에 속하게 되었다. 1018년(현종 9) 제주는 원주목에, 청풍은 충주목으로 갈라서 속하게 되었다. 제주에 감무(監務)를 둔 것은 1106년(예종 1)으로, 청풍은 이보다 조금 더 이른 시기에 감무를 두었던 것 같다. 1317년(충숙왕 4) 고을 출신 승려 청공(淸恭)이 왕사(王師)가 되면서 군(郡)으로 승격하여 수령으로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었다.
[특별 행정 구역]
제천에는 원림부곡(員林部曲)·양성부곡(陽城部曲)·소당부곡(小堂部曲)·산척처(山尺處)·전사처(箭事處)·공재소(空榟所) 등의 특별 행정 구역이 있었고, 청풍 쪽으로는 목촌소(木村所)·전산소(箭山所)[제천시 금성면 활산리]·결매소(結買所)와 탄지부곡(炭枝部曲)이 있었다. 청풍 남쪽으로는 충주가 관할하던 덕산향(德山鄕)이 들어와 있었다.
[외세와의 항전]
1217년(고종 4) 봄 3만 명의 거란군이 원주까지 남하하였다. 7월 초 중군병마사 최원세(崔元世), 전군병마사 김취려(金就礪)가 지휘하는 고려군이 충주·제천 간에서 적을 크게 물리쳤다. 이때 거란군은 늙거나 아직 어린 남녀와 병기·짐수레 등을 남기고 도망쳤다고 전한다. 이후 거란군은 동쪽으로 달아나 대관령을 거쳐 여진의 땅으로 물러섰으며, 조정에서는 항복한 거란족 사람들을 공전(公田)마을에 정착시켜 살게 하였다. 이곳이 훗날 거란장터라고 일컬어진 곳이다.
몽골이 침입했을 때도 제천 지역은 전란을 비껴가지 못하였다. 일곱 차례에 걸친 침입 중에서 5차와 6차, 7차 침입 때 몽골군은 제천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1231년(고종 18) 12월 몽골군이 충주까지 휩쓸 때 노군(奴軍)의 지휘관인 지광수(池光守)와 승려 우본(牛本) 등이 노군 및 잡류(雜類)를 이끌고 관리들이 달아나 버린 충주 지역을 지켜 냈다.
1253년(고종 40)에는 몽골 장수 야굴(也窟)의 군대가 충주를 70여 일 동안이나 포위한 일이 있었다. 이때도 충주산성 별감낭장인 김윤후(金允侯)가 관노들을 격동시켜 지켜 냈다. 이듬해에는 차라대(車羅大)의 몽골군을 충주산성에서 막아 냈으며, 또 다음 해 가을에는 남쪽으로 돌아오는 몽골군을 대원령(大院嶺)[하늘재]에서 맞아 1천여 명이나 베는 큰 전과를 올렸다.
1256년(고종 43) 4월 몽골병이 충주산성까지 쳐들어 왔다. 이때 관리와 노약자들이 월악산의 신사(神祠)로 피신하였는데, 갑자기 안개가 자욱하고 비바람과 우레·우박이 쏟아지자 몽골군이 신령의 조화라 여기고 물러섰다고 한다. 그밖에 1258년(고종 45)에 있었던 몽골의 마지막 침입 때도 충주별초가 박달재에 숨어 있다가 기습하여 포로와 군수 물자를 노획하였다.
이상의 기록에서 많은 경우 ‘충주’라고 지칭하지만 사실은 제천 지역, 또는 제천과 인접한 지역일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산성이 오늘날의 덕주산성(德周山城)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 후기 제천 지역은 왜구와도 대결했다. 1383년(우왕 9) 6월에 제천까지 왜구가 들어와 산발적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같은 해 11월에는 청풍의 금곡촌(金谷村)에서 도순찰사 한방언(韓邦彦)이 8명의 왜구를 베었다. 한방언 외에도 최운해(崔雲海)가 충주·단양·제천 부근에서 왜구와 여러 번 싸워 이기고 그 공으로 충주목사가 되었다는 기록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