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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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時發 |
영어음역 | Yi Sibal |
이칭/별칭 | 양구(養久),벽오(碧梧),후영어은(後潁漁隱),충익(忠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양식 |
[정의]
조선 후기 제천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양구(養久), 호는 벽오(碧梧)·후영어은(後潁漁隱). 아버지는 진사 이대건(李大建)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김도(金燾)의 딸이다. 아들로 이경억(李慶億)이 있다.
[활동 사항]
이시발(李時發)[1569~1626]은 이덕윤(李德胤)의 문인으로, 1589년(선조 22) 사마시와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어에 능통하여 전쟁 중 명나라 장수와의 외교에 많은 공을 세웠다.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세자시강원 사서, 병조 좌랑, 병조 정랑, 순무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6년(선조 29) 부여에서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승진하였다. 또한 그해 겨울 왜군이 다시 침입하자 찬획사(贊劃使)로 임명되어 월악산에 덕주산성(德周山城)을 쌓고 조령에 목책을 쌓았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는 분조(分朝)의 호조 참의가 되어 명나라 원병의 군량미 보급을 관장하였다. 1601년(선조 34)에는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4년간 선정을 베풀었으며, 1604년(선조 37)에는 형조 참판을 지내고 이듬해에는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포루(砲樓)와 성곽을 수축하였다.
이후 폐모론에 반대하여 양사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였다가, 1619년(광해군 11) 광해군의 특명으로 오도참획사로 임명된 뒤 이듬해 평안도에 가서 민폐를 바로잡고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을 마련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한성부 판윤에 등용되었고, 이어 형조 판서·삼남도 검찰사(三南道檢察使) 등을 지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주변록(籌邊錄)』, 『벽오유고(碧梧遺稿)』가 있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196-11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