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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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命夏 |
영어음역 | Yi Myeongha |
이칭/별칭 | 이주윤(李柱允),우문(又文),몽학(夢鶴)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완회 |
출생 시기/일시 | 187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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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몰년 시기/일시 | 1921년 3월 3일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성격 | 의병|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이강년 의진 소모장|대한독립단 무장대원 |
[정의]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이자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주윤(李柱允), 자는 우문(又文), 호는 몽학(夢鶴).
[활동 사항]
이명하(李命夏)[1878~1921]는 경기도 광주에서 왕실의 후예로 태어났다. 위정척사론(衞正斥邪論)을 견지하던 유인석(柳麟錫)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고, 서울로 올라가 근대 교육 기관으로 변신 중이던 성균관에서 한학과 신학문을 수학하였다. 이로써 신구학문을 겸비하고 근대적 민족의식을 습득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관직에 나아가 제천군 주사로 봉직하며 근대 학교를 세워 교육 계몽 운동을 폈다.
그러나 국권 침탈에 분노하여 1907년(순종 1) 여름 이강년(李康秊)이 일으킨 의병 운동에 투신하여 소모장으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직후 1910년 국권 피탈을 당한 뒤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진룡 의병장과 함께 무장 투쟁을 하였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서간도 일대의 의병 계열 독립운동 단체들이 합류하여 대한독립단을 창단하고, 무장대를 조직할 때 이에 동참하였다.
이후 대한독립단 무장대에 참여하여 여러 차례 국내 진공 작전을 수행하면서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였다. 나아가 국내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 조직인 보합단과 연계 투쟁을 전개하면서 의주·용천·선천 등지에서 친일파 관리를 숙청하고 부호들에게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일제의 이른바 ‘경신대토벌’ 작전으로 압록강·두만강 일대의 변경 지역은 물론 서간도·북간도 일대에서 무장 투쟁이 어렵게 되어, 압록강 대안의 교통의 요충인 중국 안동 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여기서 동지들과 군수품 등을 마련하여 재차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 영사관 경찰들과 격전을 벌여 일경들을 처단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 일로 일본 영사관과 평안북도 경찰부 소속 경찰대의 추격을 받아, 1921년 3월 3일 일본 경찰대와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결국 이 전투에서 15명의 독립군 동지들과 함께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