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1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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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容俊 |
영어음역 | Yi Yongj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구완회 |
[정의]
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이용준(李容俊)[1907~1946]은 본관이 광주(廣州)이며, 1925년 3월 제천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제천군청에 근무하다가 신간회에 가담하는 등 민족 운동을 하였다. 1930년 『동아일보』 봉천지국(奉天支局) 보급원으로 만주에 갔다. 이듬해 원심창(元心昌)의 권유에 따라 베이징(北京)으로 옮겨 가 무정부주의 운동에 종사할 것을 결심하고 다시 상하이로 갔다.
이후 무정부주의 계열의 의열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였고, 동년 12월에는 그 실행 부원이 되었다. 혁명적 구실을 담당할 결심으로 백정기(白貞基)의 권유에 따라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에 입단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엄순봉(嚴舜奉)·김성수(金聖秀)와 함께 활동하였다. 1932년 상하이 사변이 발생하자 일시 피신하였다가, 일제 침략 원흉의 암살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동년 12월에는 유기석(柳基石)의 권유로 톈진[天津] 일본 총영사관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큰 피해는 입히지 못하고 일부를 파괴하는 데 그쳤다.
1933년 3월 상하이 일본 공사(公使) 아리요시 아키(有吉明)을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1935년 3월 정화암 등과 상하이 거류민회 부회장으로서 친일파인 이용로(李容魯)를 처단하였다. 1937년 충칭[重慶]에서 조직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8년 말 베이징에서 아리요시 아키 처단 계획 혐의로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되었다. 1940년 11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및 강도 미수, 「폭발물 취급법」 위반 및 살인 미수 혐의로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