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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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鍾觀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오경택 |
추모 시기/일시 | 1887년 - 김종관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증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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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김종관 출생지 -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 |
정려 | 효자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김종관 지려 -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김해(金海) |
[정의]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할아버지는 음죽 현감(陰竹縣監)을 역임한 김현택(金顯澤)이고 아버지는 효자로 정려되고 동몽교관에 증직된 김학배(金鶴培)이다.
[활동 사항]
김종관(金鍾觀)[?~?]은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돈독하여 밖에 나가 좋은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부모에게 바치는 등 봉양하는 데 충심을 다하였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학문적 명망이 높았던 익산(益山)의 인산(仁山) 소휘면(蘇輝冕)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익혔다.
한말의 의병장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찬한 정려기에 따르면, 부모가 병이 나면 걱정을 다하고 초상에는 슬픔을 다하였으며 제사에는 공경을 다하여 비록 옛날의 효자라 하더라도 그보다 나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아버지 김학배가 병으로 음죽(陰竹)의 할아버지 임소에서 죽었는데, 김종관이 반구(返柩)하여 금강(錦江)에 이르자 바람이 몹시 사나워 건널 수가 없었다. 일어나 하늘을 보고 대성통곡하며 수없이 머리를 조아리니 잠시 후에 바람이 잠잠하여 무사히 건넜는데, 당시 뱃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고 감응이 신속함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이후 세상이 날로 변함을 보고는 세속과 단절하고 조용한 곳에 집을 마련한 후 학문에 전념하고자 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서른 두 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상훈과 추모]
1887년(고종 24) 효행으로 정려가 내려졌으며,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증직되었다. 1904년(광무 8)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정려기(旌閭記)를 찬하였으며,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에 정려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