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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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寺刹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경석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에 있는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생활하며 불법을 익히는 장소이다.
[개설]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 최초로 세워진 절은 573년(위덕왕 20)으로 전하는 심원사(深院寺)이다. 이처럼 전라북도 지역의 불교는 이미 백제 후기인 6세기에 전파된 것으로 보이는데, 진안 지역의 불교 전파도 전라북도 지역에서 빠른 시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신라 시대 사찰로는 보흥사·고림사·천황사·옥천암 등이 있고, 그 후대 사찰로 조선 시대 대표적인 사찰로는 금당사와 천황사를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근현대 진안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은 관광 명소인 마이산 내의 탑사와 은수사 등을 들 수 있다.
[신라 시대의 사찰]
기록 및 구전으로 전해지는 신라 시대 창건된 진안 지역의 사찰로 보흥사, 고림사, 천황사, 옥천암 등을 들 수 있다. 보흥사는 668년(문무왕 8)에 창건 당시에는 광덕사로 불렸다 하며, 고림사는 672년(문무왕 12)에 원효가 부귀산에서 수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창건됐다고 전한다. 그리고 천황사는 875년(헌강왕 1)에 무염(無染)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며, 그 뒤로 천태산 자락에 있는 옥천암은 892년(진성여왕 6)에 정현 선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이처럼 용담과 운장산 지역의 불교 전래는 진안 지역 뿐 아니라 전라북도 지역에서도 이른 시기에 해당된다. 이는 운장산과 구봉산의 풍수 지리적 영향 때문일 것으로 추측되나 불행히도 동학과 6·25 전쟁 때 많은 사찰들이 소실되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사찰]
고려 시대 전라북도 진안 지역의 사찰에 관련하여 전하는 자료가 없어 정확히 그 내용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용포리 반룡 마을 북쪽 성수산 중턱에 위치에 은선암은 고려 말 반룡사로 추정하기도 한다.
조선 시대 진안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로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곳은 천황사, 금당사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천황사는 조계종 제17교구에 속한다. 그런데 그 절의 본래 이름은 『동국여지승람』에도 보이듯이 ‘숭암사(崇巖寺)’였고 그 때문에 그곳 동네 이름이 최근까지 ‘숭암’이라고 불려 왔다. 이 절에 소장되어 있는 『용담군 천황사 규칙』[1906년]에는 1694년(숙종 20)의 기록에도 숭암사로 되어 있으며 1854년(철종 5)의 기록에 비로소 천황사로 나온다. 따라서 천황사의 본 이름은 적어도 조선 시대 숙종 때까지는 숭암사였으며, 그 후부터 철종 5년 사이에 바뀌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용담댐 건립 이전에는 신도 수가 400~500명을 넘었다고 하나 지금은 신도 수가 급감하여 과거와 같은 성세는 사라졌다. 천황사가 번성하였을 때는 9개의 암자가 소속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남암(南庵)이 유일하다.
금당사는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에 있는 절로서, 대한 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마이산 남부 주차장에서 탑사 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위치한다. 지금의 자리에 새로 세운 것은 1675년(숙종 1)의 일이다. 1978년 명부전, 1987년 산신각, 1990년 극락전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또한 조선 후기 진안 지역의 사찰은 『진안읍지』 등 기록에는 상원암(上院庵), 반룡사(攀龍寺), 내원암(內院庵), 혈암사(穴巖寺), 쇄암사(碎巖寺), 중대사(中臺寺), 숭암사(崇巖寺), 안장사(安長寺), 미적사(米積寺), 심원사(尋源寺), 용문사(龍門寺), 고산사(鼓山寺), 영구암(靈龜庵) 등의 이름이 전한다. 지금은 폐사가 되고 이름들만 전할 따름이지만 진안 지역의 불교의 성세를 짐작케 한다.
[진안 지역 근현대의 사찰]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 세워진 근현대의 불교 사찰로는 탑사, 보흥사, 은수사, 남암, 약수암, 심원사, 운봉사, 구암사, 은선암, 광명암, 마이사, 천황암, 법장사, 영각사, 수신사, 금영사 등을 들 수가 있다.
은수사는 현재 태고종단 소속인데 옛 사지(寺址)만 남아 있었는데 그 뒤 누군가 암자를 지어 정명암이라 하였다. 이후 정명암도 퇴락하여 없어졌다가 후에 은수사로 개칭되었다. 은수사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물이 은같이 맑다고 하였으므로 지어진 것이라 한다. 은수사는 본시 불당 겸 요사채로 쓰인 건물과 그 위 산신각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근래 극락전, 태극전, 대웅전, 요사채를 건립하였다.
마이산 탑사는 1920년경 이갑룡(李甲龍)이 마이산에 들어와 초가 암자를 짓고 돌탑을 쌓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절 이름도 없었으나 그가 평생 동안 만불탑을 축성했기 때문에 언제부턴가 탑사(塔寺)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이갑룡은 1957년에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평생 동안 108기의 탑을 완성시켰으며 현재 80여 기의 탑이 남아 있다. 이 탑들은 ‘마이산 탑(馬耳山塔)’이라는 이름으로 전라북도 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갑룡의 손자 이왕선이 한국 불교 태고종에 사찰 등록을 하면서 정식으로 탑사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최근에 들어선 사찰들은 주로 태고종 소속인 경우가 많고, 사찰의 규모가 작고 아직 인법당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경우들도 있다. 이러한 사찰들은 무속적이고 민간 신앙의 요소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현대 사회가 급속이 산업화되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합리적이 되어 감에 따라 진안 지역 역시 불교의 성세는 많이 위축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불심이 깊은 신도들에 의해 영불사 등 새로운 절들이 세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