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327 |
---|---|
한자 | 鎭州 |
영어음역 | Chin-j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낙진 |
[정의]
고려시대 충청북도 진천 지역의 행정구역 이름.
[제정경위 및 목적]
고려 태조가 궁예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청주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진천에 군사를 파견하여 청주 세력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청주를 진압하였던 전초기지였다는 의미에서 진주(鎭州)라고 명칭을 변경하였다. 진주는 고려군이 청주세력을 ‘진압(鎭壓)한 곳’, 혹은 고려군이 ‘진수(鎭守)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관련기록]
『고려사(高麗史)』 권56 지리지10, 양광도 청주목 진주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려 초에 강주(降州)라 칭하였다가 뒤에 지금[진주]으로 고쳤다[鎭州…中略…高麗初稱降州後改今名]”.
[내용]
진천을 포함한 청주·괴산·충주·보은 등 충청북도 지역은 후삼국시대 후백제와 세력권을 맞대고 있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들 지역의 호족 세력의 향배가 어떠한가에 따라 고려와 후백제의 주도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런데 진천의 호족들은 일찍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귀부함으로써 그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 되었다. 건국 초 진천이 강주라고 불린 것은 이와 관련이 있었다.
얼마 후 강주는 진주로 개편되었는데, 이는 후삼국을 통일하기 이전 왕건이 청주의 반란 세력을 진압한 시기와 관련이 있다. 태조왕은 쿠데타를 통해 궁예를 몰아냈는데, 이 때 궁예의 지지 기반이었던 청주 세력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진압 여부는 이제 막 고려를 건국한 태조에게는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태조는 청주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측근 세력인 마군장군 홍유와 유금필에게 사를 주어 진천에 와서 진을 치며 청주를 공략하게 하였다. 고려군은 진천을 청주반란 진압의 전초 기지로 삼아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곳 호족들의 힘으로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강주에서 진주로 개칭한 것이다.
[변천]
진천 지역은 본래 고구려의 금물노군(今勿奴郡)으로, 신라 경덕왕이 고쳐 흑양군(黑壤郡)이라 하였고, 고려 초에 강주라 칭하였다가 뒤에 진주로 고쳤다. 995년(성종 14)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이를 파하였으며 1018년(현종 9)에 청주에 내속하였다. 1259년(고종 46)에 임연(林衍)의 내향(內鄕)이므로 올려 창의현(彰義県)으로 삼아 영(令)을 두었고 1269년(원종 10)에 또 임연의 일로 지의령군사(知義寧郡事)로 올렸다가 임연이 죽임을 당함에 다시 내려 지금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고려 태조가 즉위한 후 청주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진천이 청주 세력의 반란을 진압하는 전초 기지로서 역할을 해내면서 태조는 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태조 왕건에게 진천이 가지는 정치적·지리적 중요성이 진주라는 명칭에 반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