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3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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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鎭川邑萬歲運動 |
이칭/별칭 | 진천읍 3·1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제우 |
성격 | 독립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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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19년 3월 15일 |
종결연도/일시 | 1919년 4월 4일 |
발생(시작)장소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
관련인물/단체 | 이상직|조태경 |
[정의]
1919년 3월과 4월에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에서 전개된 3·1운동.
[역사적 배경]
일제의 한국 강점과 무단 통치에 대항하여 1919년 3·1운동이 서울에서 시작하여 전국에 파급되었다. 충청북도 진천 출신 재경 조명희[중앙고보]와 홍순복은 서울에서, 박승하[청주농업학교]는 청주에서 각기 재학 중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다.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일원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1919년 3월 15일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경과]
1905년 문명학교[현 상산초등학교]를 세워 배일 민족독립사상을 고취해 오던 이상직(李相稷)[이상설의 종형제] 등이 주동이 되어 1919년 3월 14일 저녁 비밀리에 자택 객실에서 각 마을 대표들과 협의하여 장날인 3월 15일 정오에 일제히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날 밤 일제의 헌병보조원이 객실 마루 밑에 잠복하여 계획의 전말을 엿듣고 진천 헌병주재소에 고발함으로써 이상직 등 몇 명이 검거되어 만세운동 계획이 좌절되는 듯 하였다.
그렇지만 3월 15일 낮 예수교[대한성공회 진천교회·진천감리교회] 전도 부인들이 읍내 각 마을을 순회하면서 독립만세운동 계획의 사실을 알리고 저녁에 각기 마을의 앞산 또는 뒷산에서 횃불을 올리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도록 계몽하였다. 그리하여 3월 15일 저녁 진천읍을 둘러싼 돌고개·걸미산·도당산·문안산·봉화산 산마루에서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이 봉화로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이때 봉화 시위를 하던 천도교도 박주철은 달려온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며칠 뒤 석방된 이상직과 광혜원면의 윤병한(尹炳漢) 등은 지난 3월 15일의 읍내를 비롯한 각 군과의 만세시위운동이 계획적으로 거행되지 못한 것을 거울삼아 다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려고 극비리에 각 면 동지들과 연락하고 4월 2일에 온 군민이 일제히 궐기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4월 2일 진천읍을 비롯하여 광혜원면·백곡면·이월면에서 일제히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진천읍내에서는 이상직의 지휘 아래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 시위행진을 하면서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위 행렬이 헌병대 앞을 통과하려 할 때 헌병대는 시위 행렬에 야만적으로 발포하여 1명의 피살 순국자와 수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군중은 더욱 기세를 높여 헌병대를 공격하여 헌병대 창벽과 기물을 파괴한 뒤 자진 해산하였다.
[결과]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에서 1919년 3월 15일 밤 봉화 횃불 시위로 시작된 만세운동은 진천읍과 각 면으로 확산되었다. 4월 2일에 진천읍에서는 두 번째로 만세운동이 일어나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일제 헌병대는 평화 시위 행렬에 무차별 발포하여 만세운동을 탄압하였다.
거사 직후 이상직을 비롯한 수십 명이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고 심지어는 진천공립보통학교 학생 유순복, 이용달 등 10여 명의 어린 학생들도 잡혀가 심한 고초를 당하였다. 장관리 조태경은 헌병대에서 당한 고문으로 그날로 순국하였다. 진천읍 만세운동은 초기부터 비교적 격렬하였기 때문에 순국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였으나 국가로부터 포상된 진천읍 출신의 열사는 이상직뿐이다.
[의의와 평가]
1919년 3월 15일과 4월 2일의 진천읍 만세운동은 충청북도 지역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며, 아울러 봉화만세운동 역시 충청북도 지역 최초의 거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