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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654
한자 李成文
영어음역 I Seongmu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사송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호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
출신지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사송리
성별
생년 1703년연표보기
몰년 1728년연표보기
본관 경주(慶州)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중어(仲魚) 이타(李鼉)의 후손이다.

[활동사항]

이성문(李成文)[1703~1728]은 지금의 진천군 백곡면 사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성품이 용맹하고 효성스러워 고을에 이름이 났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이 의병을 모집하여 방어하려는 계책을 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로 청주성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봉상과 함께 반란군에 붙잡혀 협박을 당하자 비분강개하며 꾸짖고, 혀를 깨물어 24세의 나이로 자결하였다.

당시 이성문은 80세 노모와 2살배기 아들, 부인 경주정씨(慶州鄭氏)를 향리에 둔 채 전투에 참가하였다. 청주성으로 향하면서 이성문은 부인에게 “내가 지금 출전하면 생사를 기약할 수 없소이다. 만일 전사하면 노모를 잘 봉양하고 어린 자식을 잘 키워 주기 바라오.”라는 당부를 남기고 떠났다. 이성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도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남편의 유언에 따라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시었다. 시어머니가 노환으로 별세하자 삼년상을 마쳤으며, 이후 남편의 제삿날을 맞아 제사상을 차린 뒤 시어머니의 산소에 성묘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그날 밤에 자결하였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사송리 산43-1번지에 부부 합장묘로 조성되어 있다. 묘비에는 ‘성문(成文)’을 호(號)라고 하면서 그 이름은 ‘집문(集文)’이라 하였는데, 충렬각 비문에 의거하면 착오임을 알 수 있다.

[상훈과 추모]

지역 유림들이 이성문과 부인 경주정씨의 충의와 정렬을 기려 정려문을 세워 주도록 천거하니, 1884년(고종 21) 정려의 명이 내려졌다. 충렬각은 진천군 백곡면 사송리 산43-1번지 이성문 부부의 합장묘 앞쪽에 위치한다. 충렬각 내에는 편액 대신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의 제목은 ‘충신증병조참의이성문지려(忠臣贈兵曹參議李成文之閭)’와 ‘열녀참의이성문처숙부인경주정씨지려(烈女參議李成文妻淑夫人慶州鄭氏之閭)’라고 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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