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6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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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順坤 |
영어음역 | I Sungon |
이칭/별칭 | 중후(仲厚)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호수 |
[정의]
조선 후기의 무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후(仲厚). 증조할아버지는 풍천부사를 지낸 이시득(李時得)이며, 할아버지는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된 이경회(李慶會)이다. 아버지는 호조참판에 추증된 이인형(李寅馨)이고, 어머니는 순흥안씨로 진사 안여지(安汝止)의 딸이다. 부인으로는 김위(金煒)의 딸인 연안김씨와 진사 신필한(申弼漢)의 딸인 고령신씨(高靈申氏)가 있다. 형으로 이재곤(李載坤)이 있다.
이순곤(李順坤)[1652~1729]의 집안은 증조할아버지 이시득 이후 무과로 관리를 많이 배출한 무관 집안이다. 당색은 아버지가 청주 신항서원의 재임(齋任)으로 있으면서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갈등을 빚은 것으로 보아 친소론(親少論) 계열로 파악된다. 후손들의 묘소가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일대에 있는 것으로 보아, 말년에는 청주 북강내이면[현재의 청원군 북이면]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순곤은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청주 및 그 인근 지역 경주이씨(慶州李氏) 팔별자손 풍천공파 종중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활동사항]
이순곤은 1696년(숙종 22) 목민관으로서 기근을 당한 순천의 백성들을 잘 진휼하고 다스린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1712년(숙종 38) 죽산부사로 재직 중 향교에서 정원 외로 모집한 교생이 너무 많아 450명을 제외시켰는데, 이에 교생들이 향교의 문을 부수고 위판(位版)을 훼손하는 난동을 일으켰는데, 이 사건을 빨리 해결하지 못한 과오로 파직되었다.
이후 경상우병사를 역임하였고, 1723년(경종 3) 함경도북병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아 곧 물러났다. 말년에 고향에서 은거하던 중,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출정하여 반란군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729년(영조 5)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호명리에 있으며, 상석·망주석·문관석 등이 갖추어져 있다.
[상훈과 추모]
조정에서 제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978년 묘소 입구에 후손들이 세운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좌의정 이유원(李裕元)이 지은 것이다. 후손들이 청원군 북이면 호명리에 재실(齋室)을 지어 향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