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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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八均 |
영어음역 | Shin Pal-Gyun |
이칭/별칭 | 동천(東川),윤수(允壽)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제우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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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출생: 서울 중구 정동] |
성별 | 남 |
생년 | 1882년 5월 19일(음력) |
몰년 | 1924년 7월 2일 |
본관 | 평산 |
대표경력 |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 |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평산(平山). 호는 동천(東川), 자는 윤수(允壽)이다. 전통적인 무반 가문의 후예로서 구한말 시위대에서 근무하였다. 군대해산 뒤 만주와 북경, 상해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었으며,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을 역임하였다.
[활동사항]
신팔균(申八均)[1882~1924]은 판중추부사 신헌(申櫶)의 손자이며 한성부판윤 신석희(申奭熙)의 장남으로서 전통적인 무반 가문의 후예로 태어났다. 1900년 10월 14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학하여 재학 중인 1902년 7월 6일 육군 참위로 임관하였으며, 이듬해 1903년 9월 20일 보병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그는 선대의 후광으로 시위대[1902~1907]·진위대[1907. 4. 30. 보병 부위]·근위대(1907. 8. 26~1909. 1. 6. 보병 정위)의 요직에서 근무하였으며, 특히 1907년 8월 군대의 강제해산 때에도 해임당하지 않고 정위로 승진하여 황실 경호에 배치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한국 침략의 강도가 강해지면서 신팔균 역시 직장에 머물 수 없어, 1909년 8월 이후 낙향하였다.
1908년 11월 동생 신필균(申必均)은 일가인 신재균과 함께 1897년 신욱(申木+郁)이 고향인 진천군 이월면 노곡리에 세운 학교를 인수하여 보명학교(普明學校)[지금의 이월초등학교]로 개칭한 뒤 문중적 기반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신팔균은 이 학교 운영에 참여하여 국어·역사·지리·한문 등을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시켰다.
1909년에는 안희제(安熙濟)·오상근(吳尙根)·서상일(徐相日)·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하여 국권 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4년경 일제강점기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만주·북경·상해 그리고 시베리아 등을 전전하며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8년 봄에는 여준(呂準)·정안립(鄭安立)·김좌진(金佐鎭) 등 39명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19년 4월에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교관이 되어 지청천(池靑天)·김경천(金擎天)과 함께[동만의 3천으로 불림] 교관으로서 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독립전쟁 지도자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이범석(李範奭)·김경천 등과 함께 2,0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졸업생 대부분은 각 독립군단에 소속되어 직접 독립전쟁에 참여하였고, 특히 청산리대첩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일부는 한인사회에 설립된 각 지역 민족학교의 교원이 되어 애국청년들을 양성하였다. 청산리대첩 등으로 참패한 일제는 대규모 병력으로 만주를 강점하고 한국인 학살, 즉 경신참변(庚申慘變)[1920. 10~11]을 자행하였다.
그는 망명 이후 북경과 서간도를 왕래하면서 활동하였다. 특히 경신참변 이후 북경에 거주하면서 일제의 한인학살 때 발생한 한인 고아 교육을 위해 1922년 조직한 한교교육회(韓僑敎育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북경고려공산당·북경한교구락부(北京韓僑俱樂部)·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등에서도 활약하였다.
특히 1923년 초에 국민대표회의 때 창조파의 중요 인물로 활동하였으며, 창조파로 구성된 국민위원회의 국무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23년 10월 중순 국민위원회가 고려공산당 중앙집행부에 병합되었는데, 이때 그는 군무위원장에 피선되어 5개 군구(軍區)를 관할하였다. 그는 둔전제(屯田制)에 입각하여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군구 이 외에 2개의 별동대[제1대 대장 임병극, 제2대 대장 최준형]를 편성하여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서 국세의 징수와 적의 시설 파괴 및 처단 등의 활동을 하였다. 각 군구 사령관은 만주의 무장독립운동계를 대표하는 맹장이었다.
1922년 8월에 남만주 일대에서 의군부·광복단 등 8개 독립군 단체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통합·결성되어 만주 지역 친일 주구배를 처단하는 등 무장투쟁을 전개하였으나, 이념의 갈등과 의용군의 분립, 그리고 상호 무력충돌과 재정난 등으로 매우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통의부는 1924년 1월 8일 개최된 중앙위원회에서 위원장제도로 개편하고 북경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를 군사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이를 수락하여 같은 해 4월 20일 흥경현 왕청문에 도착하고, 6월 21일에는 의용군사령관을 겸직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대한통의부의 가장 중요한 군사 활동의 총책을 맡게 된 것이다. 대한통의부는 그의 부임 이후 잔류한 제4중대와 유격대 등 잔여 병력으로 조직을 재정비하는 한편, 대대적인 모병으로 5개 중대로 재편하였다. 이에 그는 재편된 의용대의 사령관이 되어 흐트러진 군대 기강을 바로잡아 항일 독립전쟁의 역량을 정비하는 데 힘썼다. 각지에 주둔하던 자질이 부족한 군인을 뽑아 따로 무관학교와 같이 사관자격을 갖춘 군인을 양성하기 위한 ‘사관학원’을 개설·운영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24년 7월 2일, 무기를 탈취하고자 하는 귀순 마적으로 구성된 중국 지방군의 습격을 받아 항전하는 과정에서 전사·순국하였다. 장군의 순국 소식을 전해들은 부인 임수명(任壽命)은 갓 난 딸과 함께 자진하였다. 장남 신현충(申鉉忠)은 중국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수료 중 지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투신 자결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신팔균의 업적을 기리어 1963년 국민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3년에는 이월초등학교 교정에 그를 추모하는 사적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