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1099 |
---|---|
한자 | 聖公會 |
영어의미역 | The Anglican Church of Korea |
이칭/별칭 | 대한성공회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제우 |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영국의 국교회.
[개설]
성공회는 16세기 영국에서 종교 개혁의 결과 성립 및 발전하여 세계 전역에 퍼진 국가별 독립·자치 교회들의 교단으로 영국교회·앵글리컨처치·영국성공회·잉글랜드교회라고도 한다. 성공회라는 명칭은 ‘하나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라는 교회에 관한 신앙 고백 가운데 성(聖)과 공(公) 두 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성공회는 근세 영국의 해외 진출에 따라 북아메리카·아프리카·아시아·오세아니아로 확대되었으며, 대표 주교인 캔터베리대주교 관구와 통공(通共) 관계에 있는 모든 교회를 일컫게 되었다. 세계성공회는 중앙 헌법이나 연방적 통치 체제를 갖지 않으며, 독립 관구가 되지 못하여 캔터베리대주교 관할 하에 있는 소수 교회를 제외한 나머지 성공회는 나라마다 독립된 관구나 관구군을 갖고 독립적인 헌장과 교회법 체계를 갖추어 독자적으로 운영된다.
[변천]
영국성공회의 본격적인 한국 선교는 초대 주교로 서품된 영국인 코프[한국명 고요한] 주교가 1890년 9월 29일 제물포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선교 잡지인『모닝캄』[朝鮮: The Morning Calm]을 발행한 것이 훗날 한국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불리는 연원이 되었다. 중부 지방인 진천에 성공회가 설립된 것은 1907년으로 당시 서울 정동교회 주임사제인 영국인 구르니(W. N. Gurney)[한국명: 김우일] 신부가 진천의 관할 사제로 파송되면서 시작되었다. 성공회 진천교회는 진천 최초의 교회로 이미 설립된 강화, 서울, 수원과 더불어 중부 지방 선교의 거점이 되었다.
1907년 진천읍 읍내리 329번지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고 1908년 1월 3일 60칸의 성바우로성당을 축성한데 이어 1908년 광혜원교회, 1909년 청원 묵방교회, 1910년 음성교회를 각각 설립하면서 선교 지역을 무극, 청주, 충주, 병천 등지로 넓혀 나갔다. 초기 선교사들은 성공회의 토착화를 위하여 한국 문화 및 종교 연구, 교육, 의료 활동에 힘썼고 근대 민족 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공회의 진천 지역 선교는 교회, 교육, 의료를 축으로 하는 삼각 선교로 전개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강탈당하자 이에 대항하여 진천 지역에서도 ‘정미의병[1907~1910]’으로 의병 항일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불안한 상황 속에서 의병을 비롯한 진천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의 보호를 받기 위해 성공회를 찾았으나 일제는 의병과 내통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가택 수색 등으로 성공회 신자들의 선교 활동을 제약하였다. 이러한 혼란의 상황을 1908년『조선성공회월보』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충청북도에 일본군인과 일진회원들과 자위단이 대치하고 있으나, 교우들 중에는 한 사람도 일진회나 자위단에 참여한 사람들이 없으며, 다만 바라는 것은 비록 비할 바 없는 괴로움과 행패를 받을지라도 아무쪼록 서로 힐난하거나 시비함이 없이 십분 조심하여 참아 견디되 주의 말씀을 의지하여 행하기를 기구하나이다. 1908년 9월 1일 진천교회 임야고보 전도사 씀"
가난과 질병 그리고 교육의 문제는 성공회 선교의 첫 번째 과제였다. 인천 성 루가병원에서 근무하던 의사 로스(A. F. Laws)[한국명: 노인산] 부부는 1909년 말 진천에 내려와 학교로 사용하던 건물을 임시로 전용한 병원에서 환자 치료를 시작하였다. 그 후 병원을 한옥으로 신축하고 이름을 애인병원(愛人病院, Hospital of Love of man)이라 명명하였다. 이는 서울과 제물포에 이은 한국성공회의 세 번째 신식 병원이었다.
1911년 상반기 외래 환자 1,193명과 재래 환자 2,117명을 진료했으며 입원 환자도 53명에 이르렀다. 본 건물, 입원실, 수술실, 원장실이 갖춰진 중부권 최초의 신식 종합 병원이었다. 이후 1941년 일제의 외국인 추방 정책으로 폐쇄되었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다시 3년간 운영되다가 완전 폐쇄되었다. 현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여 교우가 봉헌하여 마련된 수술실만이 보전되어 있다.
교육 사업으로는 유치원, 야학 그리고 학당이 설립되었다. 이중 야학은 낮에 일하고 밤에 모여 공부하는 것으로 10명의 교사가 갑·을·병 3반으로 편성된 70여 명의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1908년에는 어린이 교육을 위해 신명학교가 설립되어 1938년에 4년제 소학교로 승격되었으며 이후 1943년 4월 1일 개교한 현 삼수초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당시 신명학교는 먼 거리의 학생들을 위하여 기숙사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한편 복음 선교는 중앙에서 파송된 관할 사제, 전도사, 전도 부인, 수녀 등으로 이루어진 기본 조직을 통해 이월, 광혜원, 무극, 음성, 충주, 청주, 병천 등지로 확대되었으며 1923년 통계로 세례 신자 940명, 어린이 주일 학생 250명에 이를 정도로 번창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는 첫 번째 성당이 1908년에 화재로 소실된 이후 성모와 성요한 성당으로 신 성당을 건축하여 축성식을 거행했으며 현 교성리 63-10번지[문화3길 72]의 한옥 성당은 등록 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2003년에는 다시 신 성당을 신축했으며 2007년에는 선교 100주년을 맞아 지역 주민을 초청하여 선교 100주년 축하 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활동사항]
진천성공회는 교회가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돌보는 시스템을 갖추고 신 성당과 옛 한옥 성당 사이에 죽은 이들을 위한 200여 기의 납골 묘지를 설치할 수 있는 묘역을 조성하였다. 또한 지역과 함께하는 선교 사업으로 농촌노인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다문화 가정 지원 사업과 교회 내 신자 자녀 및 삼수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학 사업도 펼치고 있다.
[현황]
2009년 현재 진천 지역의 주요 성공회 교회로는 성공회 교회 가운데 충청북도에서 제일 먼저 설립됐으며 진천군 최초의 개신교인 성공회 진천교회가 있다. 관할사제는 강민용[시몬] 신부이며 등록 신자 수는 300여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