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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마을 망제와 충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1077
한자 龍藏-望祭-蟲祭
영어음역 Yongjang Maeul Mangjewa Chungje
영어의미역 sacrificial rites of Yongjang Village for inviting rain god and expelling harmful insects
이칭/별칭 용장마을 들제와 산제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용장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나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간신앙|마을신앙
의례시기/일시 [망제]정월 대보름|[충제]음력 6월 1일
의례장소 용장마을에서 500m 정도 떨어진 길가|마을 뒷산
신당/신체 8위의 신|3위의 산신
제관 마을사람

[정의]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용장마을에서 매년 지내고 있는 마을제사.

[개설]

용장마을에서는 두 종류의 동제가 전해오고 있는데, 하나는 정월 대보름에 지내는 마을제사로서 망제(望祭) 또는 들제라고 부르는 제사이고, 다른 하나는 음력 6월 1일에 지내는 충제(蟲祭) 또는 산제(山祭)라고 부르는 제사이다.

망제는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마을사람들의 소망성취를 기원하면서 올리는 제이나, 충제는 여름 농사철에 병충해의 방제를 기원하는 기능적인 제사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염병이 돌면 마을 입구마다 금줄을 꼬아 걸고 마을 안 삼거리에서 거릿제를 모셨다.

[신당/신체의 형태]

망제는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500m 정도 떨어진 길가에서 모신다. 예전에는 그 옆에 제사를 모시는 제단이 있었으나 경지정리를 하면서 없어졌다. 지금은 그곳에서 가까운 다소 넓은 길가에 차일을 치고 제사를 모신다.

축문과 지방문을 보면 망제에서 모시는 신은 모두 8위이다. 축문에는 사직신지위(社稷神之位)·성황신지위(城隍神之位)·세자대군신지위(世子大君神之位) 등 3위가 나오고, 따로 한 장씩 적은 지방문에는 동방청제장군(東方靑帝將軍)·서방백제장군(西方白帝將軍)·중앙황제장군(中央黃帝將軍)·남방적제장군(南方赤帝將軍)·북방흑제장군(北方黑帝將軍) 등 5위이다.

앞의 3위는 제상을 마련하여 모시고, 5방신장은 대나무를 쪼개 지방을 꽂고, 이것들을 제단을 중심으로 하여 5~6m 거리를 두고 둥근 형태로 땅에 세운다.

충제는 마을 뒷산에서 모신다. 예전에 모시던 곳이 있었으나 근래에는 그곳까지 오르는 것이 힘이 들어서 산자락 아래로 장소를 옮겨 모셔왔다. 그러나 이것도 2006년부터는 모시지 않기로 마을에서 결의를 하였다.

축문을 보면 충제에서 모시는 신은 모두 3위의 산신들이다. 남지산신위(藍芝山神位)·노선산신위(老仙山神位)·성황산신위(城隍山神位)로 모두 마을 주변에 있는 산들의 산신들이다.

[제관의 선정 및 역할]

제관은 제를 올리기 며칠 전에 선정하는데, 매년 제관을 뽑는 일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예전에는 서로 제관을 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제사가 끝나면 제상에 올렸던 제물을 3등분하여 제관들이 각자 집으로 가져간다.

예전 먹을 것이 귀하고 가난했을 때는 제물을 가져가기 위해서 일부러 제관을 하고자 자원하였지만, 지금은 먹을 걱정이 없는 세상이 되어서 아무도 제물에 대한 욕심이 없다. 또 행여 제사를 모시고 나서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제관을 탓하는 일도 있고 해서 더더욱 꺼린다고 한다.

요즈음은 3일이나 4일 전에 이장과 마을 어른들이 협의하여 헌관 2인, 축관 1인, 그리고 뒷심부름을 해주는 동자꾼까지 네 사람을 뽑는다. 지금은 사라진 풍속이지만, 예전에는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의 집에는 금줄을 걸었다고 한다.

요즈음 들어서 젊은 사람들이 제사를 맡아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는 늘었다고 한다. 제관으로 뽑히지 않았어도 별다른 유고가 없는 사람들은 마을일을 도와서 함께 한다는 의미로 제사에 참여한다고 한다.

[절차]

제관들은 망제를 모시는 음력 정월 14일 아침에 망제를 모실 곳으로 일체의 준비물을 옮겨간다. 가장 먼저 차일을 치고 차일 옆에 취사를 위한 준비를 한다.

제상은 차일 속에 차리는데, 이것은 사직신지위(社稷神之位)·성황신지위(城隍神之位)·세자대군신지위(世子大君神之位) 등 3위의 신들을 위한 상이다. 차일 바깥쪽으로는 동방청제장군(東方靑帝將軍), 서방백제장군(西方白帝將軍), 중앙황제장군(中央黃帝將軍), 남방적제장군(南方赤帝將軍), 북방흑제장군(北方黑帝將軍) 등 오방신장을 위한 제상을 마련한다.

3위의 신께 먼저 메를 지어올리고, 오방신장의 제상을 차린다. 오방신장의 제상은 바닥에 짚을 깔아 마련하는데, 삶은 돼지머리를 다섯 조각 내어 각각 한 조각씩 올린다. 메와 돼지머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조리를 하지 않은 채 생물을 올린다. 망제는 14일 밤 11시가 넘으면 시작된다.

제사의 순서는 집안에서 모시는 것과 같으나 제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기도 하다. 헌작과 독축을 하며, 제사가 모두 끝나면 헌식을 한다. 먼저 차일 안에 모신 3위의 신께 제사를 모시고 나면, 다음에 주변 오방신장의 제상 앞에 가서 다시 재배를 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특히 오방신장께는 “동방황제신위시여!” 하고 소리내어 말하면서 두 번 절하고 나머지도 모두 이렇게 돌아가면서 한다. 축문은 소지를 하지만, 오방신장의 지방문은 그대로 둔다.

제사가 끝나면 징을 들고 오방신장의 제상 앞을 돌면서 다섯 번 친다. 이 징소리를 들으면 마을에서는 망제가 끝난 것을 안다.

6월 1일에 모시는 충제의 경우도 제사의 방식은 같다. 충제에서 모시는 신은 3위로서 남지산신위(藍芝山神位), 노선산신위(老仙山神位), 성황산신위(城隍山神位)이다. 역시 차일을 치고 그 안에 제상을 마련한다.

산제의 경우는 메를 짓지 않고 생쌀을 올린다. 나머지 제물 역시 모두 생물로 올리며, 닭을 세 마리 준비하여 각 신위 앞에 올린다. 충제를 잘못 모시게 되면 모시는 사람의 집안이 큰일을 당하는 것으로 믿어서 금기가 매우 엄격하고 각 절차에 온갖 정성을 다한다. 마을에서도 역시 이날만은 외부출입을 삼가고, 빨래나 들일을 일체 하지 않는다.

망제와 충제 모두 제상에 올렸던 제물은 조금씩 떼어내 헌식을 하고, 나머지 남은 제물은 공평하게 3등분을 한다. 이것은 오로지 제관들만 집에 가져가서 먹을 수 있다.

[제물/용품/제구]

제를 앞두고 이장과 함께 제사를 모시는 제관들이 제물을 사러 간다. 요즈음은 주로 읍장을 보지만, 때로는 오일시장이나 배를 타고 우수영장에서 장을 보기도 했다. 장에 갈 때는 필요한 물건의 목록을 적어 간다. 물건을 사고 나서는 옆에 값을 기록하여 결산을 할 때 사용한다. 제물을 살 때는 값을 깎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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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망제제물대 서기1995 구(舊) 1월 15일

위의 자료는 양면괘지에 기록된 망제 물목기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다음은 충제의 준비물을 적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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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

위 표에서 제물은 제상에 올린 것을 말하며, 밥/찬은 충제를 모시기 위해 산에 올라가 하루 종일 지내게 되는데 이때 먹을 것들이다. 준비물은 제사를 모시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설비와 장비들이다.

망제와 충제의 제물은 거의 같지만, 망제의 경우는 돼지머리를 쓰고 충제의 경우는 닭을 제물로 쓴다는 점이 다르다.

망제든 충제든 대개 당일 아침에 심부름을 맡은 동자꾼이 중심이 되어 마을의 차일 등을 준비해서 제사를 모실 곳으로 가져간다. 요즈음은 주로 경운기에 실어서 운반한다. 여러 사람이 차일을 치고 제사를 모실 터를 만들어 놓으면 제관들이 그곳으로 옮겨간다. 오전부터 그곳에서 모여 지내면서 밥도 그곳에서 직접 지어 먹는다.

[부대행사]

예전에는 마을 입구의 선독거리(입석이 세 군데 서 있는 곳)에 금줄을 쳐서 외부인들의 출입을 막았다. 지금부터 50여 년 전에는 입석에 소의 턱뼈를 걸어두었다고 하고, 망제를 모시면서 선돌 앞에 간단한 제상을 마련하여 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현재 말로만 전해져 오고 있을 뿐이다.

망제를 모시고 나면 정월 보름날은 하루 종일 걸궁을 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논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월 대보름에는 각 가정을 돌면서 짚을 걷어다가 줄을 만들어서 마을 골목을 사이에 둔 윗동네와 아랫동네가 서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했다.

용장마을은 한국전쟁 때 다른 어떤 마을보다도 피해를 크게 입었지만, 그때도 동제를 거른 적은 없었다고 한다. 또 아이들은 불놀이를 많이 하며 놀았다고 한다.

[금기]

상을 당했거나 아이를 낳은 등 집안에 유고가 있는 사람은 제관이 될 수 없다. 또한 선정된 후에라도 제사를 모시는 기간에 부인이나 딸 등 집안여자 중에 월경을 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제관으로 선정된 이후라도 사정을 말하고 제관을 맡지 않는다.

정월 들어 개고기를 먹은 사람도 안 되며, 일단 제관으로 뽑히면 부정한 곳, 예를 들면 상가나 남의 제사에 참례하지 않는다. 부부생활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예전에는 대개 나이가 지긋한 사람으로 제관을 선정하였다.

망제나 충제를 잘못 모시게 되면 모시는 사람의 집안이 큰일을 당하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마을사람들 역시 이날만은 외부출입을 삼가고 빨래나 들일을 일체 하지 않으며 경건하게 보낸다.

[제비]

제사를 위해 필요한 경비는 매년 마을에서 호구별로 거출한다. 그러나 마을공동자금이 여유가 있으면 마을자금으로 제물을 준비한다. 2006년도에는 제비를 걷지 않았다. 마을의 재정을 담당하는 재무가 따로 정해져 있어서 제사를 위해 필요한 비용 등 마을자금을 관리하며, 매년 동계를 할 때 동제와 충제의 결산도 함께 한다.

[현황]

마을이 생기면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충제의 경우, 2006년부터는 모시지 않기로 마을에서 결정을 하였다. 제관을 선정하는 문제도 그렇고, 농약의 발달로 병충해에 대한 걱정이 많이 줄어든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망제의 경우, 경지정리를 하면서 없어진 제단을 새로 마련하기 위해 예산을 마련해놓는 등 아직까지 마을사람들에게 그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는 듯 보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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