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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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潤 |
영어음역 | Ha Yu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한중기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수부(晬夫), 호는 운수당(雲水堂). 거제 현령 하계지(河繼支)의 아들이다.
[생애]
운수당 하윤은 1477년(성종 1)에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8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 1487년에 예조좌랑과 호조좌랑을 지내고, 형조 좌랑 직에 있다가 연산군의 폭정을 보고 낙향했다.
낙향한 뒤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 행우산(行牛山)[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 운문] 기슭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1496년(연산군 2)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고 재직 중인 1498년(연산군 4)에 폐비 윤씨의 입묘추숭(入廟追崇)의 그릇됨을 극간했다. 이후 평안도 순천군수로 나가 있었는데, 그 덕택에 무오사화(戊午士禍)의 화를 면했다. 임지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학문을 탐구하는 자세가 순박하고 거짓이 없었고 정도(正道)만 걸었다. 그래서 당대 이름난 학자인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과 문대공(文戴公), 김응기(金應箕)와 교유하였다.
[저술]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운수당실기(雲水堂實記)』 등이 있다.
[작품]
하윤은 낙향한 뒤 고향인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운문에 운수당(雲水堂)을 지어 글을 가르쳤는데, 이곳에서 지은 자작시가 전한다.
[상훈과 추모]
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에 있는 정강서원(鼎岡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