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8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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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嗣悌 |
영어음역 | An Saje |
이칭/별칭 | 여원,청류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최윤진 |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여원(汝源), 호는 청류재(聽流齋)이다. 문성공 안향(安珦)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안대중(安大重)이다.
[활동사항]
안사제는 효성이 지극하고 강직하며 굳센 지조를 지니고 있었다. 1582년(선조 15)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관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아버지와 형이 어차산(於差山)에서 해를 당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복수할 것을 맹세하였다.
조경남이 창의(倡義)한다는 말을 듣고 수십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양의 당벌촌(唐伐村)에 이르렀다. 때마침 5백여 명의 왜적이 두류산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조경남과 함께 적의 정세를 정탐하였다.
적이 군사를 나누어 한 부대는 마천곡으로 들어가고 한 부대는 음리로 들어갔다는 것을 파악하고, 야음을 이용하여 음리로 숙소를 옮기고 다음날 새벽에 접전을 벌였다. 그때 또 30여 명의 왜적이 나타나 사람과 가축을 잡아가지고 달아나자, 왜적을 추격하여 잠구의 좁은 목에서 석벽에 의지하여 적에게 화살을 마구 쏘았다. 9명의 적병이 연이어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나머지도 사람과 가축을 버리고 도망갔다.
그 뒤 진사 정사달, 박언량 등과 함께 등구현(登丘縣)에 이르렀을 때 운봉현감 남간(南侃)이 수천 명의 군사를 보내어 지원하니 그 위세가 대단하여 많은 적을 무찔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시골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지내다가 세상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