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9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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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期遠 |
영어음역 | Jeong Giwon |
이칭/별칭 | 사중,현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성미 |
[정의]
정유재란 때 전라북도 남원에서 전사한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중(士重), 호는 현산(見山). 고려시대의 좌복야 정목(鄭穆)의 후손이며, 부사 정광보(鄭光輔)의 고손자, 현령 정한용(鄭漢龍)의 증손자, 사직서령 정순복(鄭純福)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내산부원군 정상신(鄭象信),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영천부정 이경(李璟)의 딸이다.
[활동사항]
정기원은 24세가 되던 해 진사에 합격하고,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문원의 주서(注書)가 되었다. 그 뒤 선조의 신임을 받아 사헌부 감찰을 거쳐 호조·형조·예조좌랑을 거쳐 사간원 정언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년 봄에 사은사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다가 그해 4월에 왜적이 우리나라를 크게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다. 임금이 의주로 피난하게 되자 정문(呈文)을 작성하여 대궐로 들어갔다.
대신들이 모두 입궐하는 틈을 타 꿇어앉았다가 정문을 올리고 난 다음, 머리를 돌벽에 부딪쳐 피를 흘렸다. 이를 본 명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명의 황제에게 고하여 곽목징 등의 구원병을 파견하도록 했다.
그 후 정기원은 병조정랑, 안악 현감(縣監), 수찬(修撰)을 두루 거쳐 좌·우승지(左·右承旨)까지에 이르렀다. 왜군이 다시 남해에 집결하여 재침의 기회를 노리고, 석성이 화의를 제기하자 그는 또다시 머리를 깨트려 피를 흘렸다. 이를 본 명나라 장수 마귀와 총병 양원으로 하여금 조선에 구원병을 파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선조는 가선으로 벼슬을 올려주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년에 양원이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명나라로부터 3,000여 명의 구원병을 거느리고 조선에 파견되었다. 이때 남원은 삼도 요충지로서 사지였다. 정기원은 양원의 접반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를 거절하지 않고, 줄곧 남원에 내려와 남원성과 참호를 수축하며 사수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남해에서 원균이 왜적에게 패하자 왜적은 곧장 남원성으로 진격해왔다. 순찰사와 조도사는 모두 도망치고 성 안에는 오직 명나라 군사만이 남게 되었으므로, 양원이 정기원에게 대피하기를 권유하였으나 그는 울면서 거절했다.
그는 의정공에게 편지를 올려 나라를 위하여 난리에 죽는 뜻을 고하고, 허리에 차고 있던 칼로 장렬하게 죽을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 이로부터 3일 후 남원성이 함락되자, 드디어 그는 의관을 정제하고 북쪽을 향하여 절한 후 순절하니 그의 나이 39세였다.
[묘소]
정기원은 전라북도 남원 향양동(向陽洞) 자좌(子坐)에 장사지냈다.
[상훈과 추모]
선조가 그의 충성을 감안하여 죽은 뒤 예조판서 벼슬을 내렸고, 다시 좌찬성과 효충자의선무원종공신을 내렸다. 시호는 충의(忠毅)공이고, 내성군(萊城君)에 추봉하였으며 『삼강행실록』에 기록하고 정문(旌門)을 세울 것을 명하였다. 남원에 충렬사를 세워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