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4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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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秉熙 |
영어음역 | Yi Byeonghui |
이칭/별칭 | 하운(河雲)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병옥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출신의 민주 투사.
[활동사항]
이병희의 아버지 이두용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치열한 항일 독립 운동을 했던 언론인 투사였다. 남원의 『조선일보』 지국장 겸 기자로 활동하면서 1926년 남원의 형평사 창립 멤버로 참여하였고, 남원 신간회, 청년동맹 등을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1929년 3월 체포되어 3년 4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출감하였으나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1944년 38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버지의 독립 운동 투신과 옥고로 가계가 기울어 이병희는 남원중학교를 졸업하고 생업에 종사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출감 후 좌익 계통의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국가 유공자 반열에서 제외되고 그 업적이 묻히자 이병희는 거의 일생을 바쳐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한 자료 수집에 전념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굴된 것들은 남원의 독립 운동 과정을 밝히는 귀중한 자료 역할을 하고 있다.
1950년에는 4·19혁명에 의하여 허정 과도 내각이 출범하고 7월 29일, 제5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이 과정에서 부정이 난무하였고 개표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개표 과정을 지켜보던 후보자 박환생이 자신과 양명주의 유효표가 무더기로 무효표에 삽입된 것을 발견한 것이다. 개표는 중단되고 도 선거위원들이 내려와 중재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남원의 청년,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하였고 경찰들과 헌병들이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7월 30일부터 시작된 시위는 31일까지 계속되었고, 31일 자정 사이렌 소리를 신호로 시위대들이 남원군청에 진입하여 투표함을 꺼내 소각했다. 8월 1일 0시 30분경의 일이다.
이 투표함 소각 사건을 주도했던 사람은 이병희, 윤성준, 이우열 등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우열은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병희는 사건 직후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체포하지 못했는데, 결국 자진 출두를 하였다.
이후 오랫동안 정당 활동을 하였고, ‘사선 문화제전 위원’로 활동하다가 황산대첩 유적지 성역화 사업 및 황산정 건립 추진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향토 문화 가꾸기 사업에 앞장섰다. 또한 집 없는 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마을 주민들과 힘을 모아 거처를 마련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