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4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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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內尺洞石佛立像 |
영어음역 | Naecheok-dong Seokbul Ipsang |
영어의미역 | Stone Standing Buddha in Naecheok-dong |
이칭/별칭 | 미륵바우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불상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용정동 93[박달길 90]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석홍 |
성격 | 석불입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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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시기/일시 | 1644년 |
제작지역 | 남원 |
재질 | 화강석 |
높이 | 1.62m |
소장처 | 내척동 마을 |
소장처 주소 | 전라북도 남원시 용정동 93[박달길 90]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내척동 미동마을에 있는 석불 입상.
[개설]
내척동 석불입상은 전라북도 남원시 내척 미동마을 소재 오장근의 주택 오른쪽 약 5m 동쪽에 서쪽 방향으로 서 있다. 불상이 서 있는 오른쪽에는 복숭아나무 1그루, 왼쪽에는 감나무, 감나무, 아래로 모과나무가 각 1그루씩 서 있으며, 미륵 앞에 가로 1.85m,세로 2.15m 크기의 시멘트로 만들어 놓은 배례단이 있다.
[형태]
전체적 모습은 육계와 나발이 있는 마애불 형태로, 양손을 가슴 높이로 치켜들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는 입상의 형태다(두광이나 신광으로 보이는 선은 없는데 아마도 배석 자체가 광배가 아닌가 싶다).
미륵의 자연석 좌대 규모는 가로가 1.85m~2.1m이고 세로가 85㎝~86㎝ 크기이다. 좌대에 전체 높이 1.62m, 폭 1.4m 정도의 배석을 세우고, 1.53m 크기의 입상을 부조하였다. 비례나 대칭이 양호할 뿐 아니라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하여 예술적 가치가 높다. 불두(佛頭)는 낮은 육계에 머리는 나발로 보이며 육계와 미간, 미간과 턱까지의 비율이 1/2 정도로 나발이 커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혔다.
머리, 눈, 코, 입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눈과 코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으나 윤곽은 또렷하고, 귀는 양 눈썹 끝에서부터 어깨까지 좁고 길게 늘어진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부처의 형태로 균형미가 있다.
목은 매우 짧은데 양쪽 어깨와 목이 만나는 지점을 깊게 파내 목의 형태를 표현하였으며, 특히 의습을 목이 깊게 파이게 만들어 짧은 목인데도 매우 긴 목처럼 보인다. 그러나 흔히 볼 수 있는 목의 삼도는 보이지 않는다.
의습은 목에서 가슴 아래까지 매우 깊게 판 형태로 2단으로 늘어뜨렸는데, 길이가 약 38㎝(1단 28㎝, 2단 10㎝), 폭 18㎝이다. 또 가슴 아래는 7단의 선으로 옷 주름을 표현하였고, 그 위로 가사 장삼을 표현하였다.
손은 탈락되어 알 수 없으나 양 소매를 돋을새김으로 표현해 놓은 것으로 보아 손을 가슴까지 치켜들고 있는 형태로 보인다. 소매 자락은 폭 10㎝, 길이 54㎝로 무릎 부근까지 길게 늘어뜨렸고, 손목을 끼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홈이 양쪽에 있다.
왼손 소매 자락은 온전하나 오른손 소매 자락은 거의 다 떨어져 나갔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부분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 또는 안고 있는 아이가 오줌을 누는 모습으로 보인다고 한다. 발은 보이지 않으나 미륵의 맨 아래 가운데 부분을 가로 10㎝, 길이 28㎝쯤을 파내어 발을 벌리고 서 있음을 표현하였다.
좌대는 높이가 5~86㎝이고 1.85m~2.1m 크기로 다듬지 않은 자연석이다. 그래서 좌우나 폭의 비례가 맞지 않는다. 재질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붉은 빛을 띤 차돌이 박힌 돌로 보인다. 불신을 세운 가운데 부분에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 시멘트로 보완해 놓았고, 특히 오른쪽 불신과 좌대가 만나는 부분에도 시멘트로 보수를 하였다. 배례단은 애초에는 없었던 것으로 근래에 시멘트로 제법 널찍하게 만들어놓았다.
[특징]
명문(銘文)은 불신 좌측 배석에 “숭덕 9년 갑신 시월 일 갱립(崇德九年 甲申 十月 日 更立)”이란 명문이 있다. 이 명문은 이 미륵을 세운 연도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글씨 서체와 조각의 기법으로 볼 때 동일인, 또는 같은 시대로 보기에는 글씨가 너무 조악하다. 아마도 이 미륵을 옮겨 다시 세울 때 새겨 넣은 것으로 보인다. 명문 맨 끝에 ‘다시 세움[更立]’이라고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새겨진 숭덕 9년(崇德九年) 갑신(甲申)은 실제 1644년(인조 22)은 청나라 태종이 물러나고 세조(世祖)가 즉위하여 순치(順治)라는 연호를 사용했던 시기로, 순치(順治) 1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숭덕 9년 갑신은 1644년이다.
이 미륵의 ‘갱립’이란 명문을 보았을 때 1644년에 옮겨왔거나, 다시 만들어 세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옮겨 세웠을 가능성을 배제하더라도 이 미륵은 1644년 10월에 다시 만들어져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마을 사람들은 미륵이 아이를 점지해 주는 효험이 있으며, 미륵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고 한다. 낮에는 그런 모습으로 보이지 않지만 밤에 보면 미륵이 오른손으로 아이를 안고 서 있는 모습이라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