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6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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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子光 |
영어음역 | Yu Jagwang |
이칭/별칭 | 우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경석 |
[정의]
조선 전기·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우복(于復). 중추부지사 유규(柳規)의 서자이다.
[활동사항]
건춘문(建春門)을 지키는 갑사(甲士) 출신으로, 1467년(세조 13) 이시애의 난에 자진 출전하여, 난이 끝나자 병조정랑이 되었다. 이후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468년 왕위에 오른 예종에게 남이의 언행과 시를 빌미삼아 그가 반역의 뜻을 품었다고 밀고하였다. 당시 영의정이던 강순(康純)을 연루시켜 죄목을 조작, 남이·강순 등을 처형하게 한 뒤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책록되고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몇 차례 중국 사신으로 다녀온 뒤 1491년(성종 22)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김종직이 죽은 뒤, 성종은 김종직 일파를 비롯한 영남 출신 유림들을 대거 기용하여 훈구파와 맞서는 신진 세력을 이루었다. 이에 연산군 4년 유자광은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것을 빌미삼아 무오사화(戊午史禍)를 일으켰다.
이 일로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다가 대간들의 탄핵으로 한때 파직이 되었다. 그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전부터 인연이 있던 성희안(成希顔)과 손잡고 의거에 참여하여, 이번에는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무령부원군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다음해 대간·홍문관·예문관 등이 들고일어나 탄핵을 계속하여 훈작이 취소되고, 흥양에 부처되었다가 해평으로 유배되었다. 이어 경상도 변두리로 이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죽었다.
[묘소]
묘소는 남원의료원 동쪽으로 300m쯤 떨어진 야산에 있다. 비석은 광한루에서 운봉으로 가는 길에 나오는 첫 번째 언덕(묘가 있는 야산)에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