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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1890
한자 張在伯
영어음역 Jang Jaebaek
이칭/별칭 장자백(張子伯),장기성(張基成),장학순(張學淳)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내동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동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판소리 명창
출신지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내동리
성별
몰년 1907년연표보기
본관 흥성
대표관직 무과 병과 급제

[정의]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조선 말기 판소리 명창.

[개설]

장재백은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이른바 후기 8명창 중의 한 사람이다. 동편제 판소리를 했던 김세종의 제자였다.

[활동사항]

장재백은 『조선창극사』에 장자백으로 되어 있으나, 호적과 전라감영의 문서에는 장재백으로 되어 있다. 또 『조선창극사』에는 전라북도 순창 출신이며 김세종의 제자라고 되어 있으나 호적에는 전라북도 남원군 주생면 내동리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재백의 부모가 순창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아 순창에서 출생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장재백김세종의 수제자로 미남이었다고 한다. 그의 처 역시 미인이었는데, 장재백이 명창으로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에 전라북도 옥구 사람의 첩으로 가버렸다고 한다. 이에 분발한 장재백은 각고의 노력 끝에 대명창이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장재백은 1885년 전라감영의 잔치에 김세종과 함께 참여하여 50냥을 받았다는 기록이 「연수전중용하기(宴需錢中用下記)」라는 전라감영의 문서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이 크게 이름을 떨치던 때인 것으로 여겨진다.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고 벼슬까지 받게 되면서 장재백은 남원을 대표하는 소리꾼으로 부상하였다. 본래 남원 운봉에는 송흥록, 송광록으로 이어지는 판소리 가문이 있었지만 송광록 대에 구례로 이사를 하여 남원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때 장재백은 명실상부한 남원의 명창으로 부상하였다.

장재백김세종의 소리를 계승하여 「변강쇠 타령」과 「춘향가」를 잘하였는데, 장재백의 더늠으로 「춘향가」 중 ‘적성가’가 전하고 있다. 이 대목은 우조 중에서도 정악의 가곡성을 닮은 가곡성 우조라는 독특한 창법으로 되어 있다. 장재백이 가곡성 우조를 부르는 대목의 더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장재백이 판소리에 정악의 음악적 자산을 도입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증거가 된다.

[묘소]

장재백의 묘는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내동리에 있다.

[저술 및 작품]

더늠으로 「춘향가」 중 ‘적성가’를 남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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