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25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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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復謙 |
영어음역 | Jang Bokgyeom |
이칭/별칭 | 익재(益哉),옥경헌(玉鏡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고은미 |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인.
[가계]
본관은 흥성. 자(字)는 익재(益哉), 호(號)는 옥경헌(玉鏡軒). 아버지 장담(張膽)과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1617년 11월 23일 태어났다.
[활동사항]
장복겸은 관직에 나가 명예를 얻고 치부를 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일생 동안 학문을 연마하고 자기가 견문(見聞)했던 일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시로 지어 노래하고 친한 벗과 술로 여생을 마치려는 의지가 강했다.
집 앞에 소동파(蘇東波)의 ‘도산불고(道山不孤)’라는 고사(古事)를 모방하여 불고정(不孤亭)이란 집을 지어 거주하였고, 만년에는 서호(西湖) 위에 옥경헌(玉鏡軒)이란 집을 지었는데, 이는 물이 수정같이 맑고 호수 위에 비친 달은 마치 거울 속의 밝은 달과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장복겸은 이곳에서 인근의 선비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며 우국 애민의 시를 지어 음송하였으며, 스스로 「고산별곡(孤山別曲)」이란 가사(歌詞)를 지었는데 이 노래 또한 문란해진 시국과 퇴락되어 가는 풍속을 한탄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때는 술을 마시고 흥취하면 서너 명의 동자들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는 등 풍류를 즐겼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산 위에 우뚝 솟은 옥경헌을 바라보고 마치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속세에 머무르는 풍경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제나 학동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성현의 교훈을 주제로 삼았으며, 주위의 사람들에게는 자제들의 훈육 지침을 정해 주었고, 또 학생들이 찾아오면 부형(父兄)을 섬기는 도리에 치중하여 강의하였다. 이러한 방침은 문인과 무인, 또는 농부와 양반에 차별이 없었고, 지위와 신분에 알맞게 교도(敎導)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어떤 사람이 옳지 못한 행위를 하면 즉시 질책하지는 않았다. 만약 많은 사람이 주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난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장복겸은 눈을 지그시 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는 『소학』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남의 과실을 들으면 귀로는 들어도 입으로는 가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니, 옛 성현이 남긴 말로도 하루 해를 보낼 수 있을 것인데, 하필이면 험담으로 입을 더럽힐 것이 무엇인가?” 하고 말했다는 일화는 그의 학문적 깊이와 신중한 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장복겸의 집은 가난하여 조석으로 먹는 찬은 산채뿐이었으나 항상 이에 만족하고 “이는 백성들에게 당연한 일이다. 하필 맛있고 기름진 생선과 육류를 구하여 마음을 더럽게 만들 것인가? 토지나 곡식은 나라의 소유이니, 그때 힘써서 나라의 풍요함에 일조하고 관리들의 수고를 덜게 하는 것이 우리 시골 선비들이 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말을 하곤 했다.
[저술 및 작품]
장복겸의 『옥경헌유고(玉鏡軒遺稿)』는 1931년 옥경헌의 7대손 장진욱(張鎭旭)이 선대 이래 종가에 소장된 문헌과 남원 지역 여러 유림들의 문집에서 수록된 시문을 수집하여 간행하였다. 서문은 월성(月城) 이재순(李在淳)과 장진욱(張鎭旭)이 지었고, 발문은 9세손(世孫) 장대식(張大植)과 장종식(張宗植)이 썼다.
[상훈과 추모]
장복겸의 후손들은 ‘흥성(흥덕)장씨 천년의 역사’라는 블로그를 만들어 조상 장복겸의 문학을 널리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