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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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신채용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지역에 조성된 조선 왕실의 안식처.
[개설]
경기도 남양주시에는 조선 시대 왕릉을 비롯하여 수많은 왕실의 능묘가 조성되어 있다. 도성인 한양과의 지리적 접근성이 좋고, 또한 수려한 자연 경관도 한몫하였을 것이다. 남양주시에는 조선 왕조의 왕실 구성원들이 잠들어 있다.
[집중적으로 조성된 남양주 지역의 왕실 능, 원, 묘]
경기도 남양주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되어 수량이 풍부하고, 토질이 비옥하여 선사 시대부터 주거지로 활용된 지역이다. 남양주 지역을 지나는 한강 유역 곳곳에는 선사 시대 주거 유적이 산재하였으며 빗살무늬토기 등 관련 유물 또한 많이 발굴되었다. 조선 시대 내륙에서 수도 한양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로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한강 유역은 중국으로 가는 뱃길 또한 가까웠기 때문에 삼국 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축을 벌여 서로 점령하려고 하였던 곳이었다. 또한 평구역(平丘驛)은 고려 시대부터 역원으로 당시 남경이었던 한성에서 내륙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조선 왕조의 수도였던 한성에서 육로나 수로로 가장 가까운 내륙 지역이 바로 남양주였고, 풍수지리적으로 이른바 ‘명당’이 많아 양반 가문의 선산이 산재하였다. 같은 이유에서 조선 왕실도 남양주 지역에 왕릉이나 원(園), 묘(墓) 등을 집중적으로 조성하였다. 현재 남양주에는 남양주 광릉(南楊州 光陵), 남양주 사릉(南楊州 思陵), 남양주 홍릉과 유릉(南楊州 洪陵과 裕陵)이 있다. 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인 남양주 순강원(南楊州 順康園)과 남양주 휘경원(南楊州 徽慶園)이 있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英親王)과 이방자가 잠든 영원(英園)도 있다. 태종의 후궁 신빈 신씨(信嬪 辛氏), 선조의 아들 광해군의 친어머니인 공빈 김씨(恭嬪 金氏), 순화군의 어머니인 순빈 김씨(順嬪 金氏),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安嬪 李氏),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暎嬪 金氏)의 묘도 멀지 않은 곳에 조성되었다. 고종 황제의 친아버지 흥선대원군의 묘인 흥원(흥선대원왕)(興園(興宣大院王)), 선조의 친아버지 덕흥대원군의 덕흥대원군묘도 남양주에 있다. 이외에도 광해군(光海君), 임해군(臨海君), 의창군(義昌君), 의안대군(義安大君) 등도 남양주에 잠들어 있는 만큼 경기도 남양주시는 조선 왕실의 선산이 있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남양주시의 왕릉]
경기도 남양주시에는 총 4기의 왕릉이 있다. 세조(世祖)와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남양주 광릉, 단종 비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남양주 사릉, 고종황제와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남양주 홍릉(洪陵),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순정효황후의 남양주 유릉(裕陵)이다. 4기의 조선 왕릉은 모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된다.
남양주 지역의 왕릉 가운데 가장 먼저 조성된 것은 남양주 광릉으로 조선 제7대 왕 세조와 정희왕후가 잠들어 있다. 광릉은 세조가 승하한 뒤 조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세조의 능은 1468년(세조 14), 정희왕후의 능은 1483년(성종 14) 완성되었다. 능의 배치 형식은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두 언덕에 있는 각각의 봉분을 하나의 정자각(丁字閣)이 모시는 형태이다. 이때까지 왕릉과 왕비릉을 나란히 조성하고자 할 때는 쌍릉이나 세종(世宗)의 합장릉 형식을 취하였지만, 남양주 광릉부터 동원이강형태도 조성되었고, 후대의 왕릉 제도에 영향을 주었다.
남양주 사릉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안장되었다. 정순왕후는 1454년(단종 2)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1455년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인하여 단종은 유배되었고, 정순왕후도 왕비의 자리에서 내쳐졌다. 이후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에서 거처하면서 82세로 생을 마감하였으니 1521년(중종 16)이었다. 당시는 단종이 추복(追復)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대군 부인의 예(禮)로 장사지내졌고, 안장된 곳은 해주 정씨(海州 鄭氏)의 선산이었다. 그 이유는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아들이었던 정미수(鄭眉壽)가 송씨를 생전에 모셨기 때문이었고, 이 때문에 송씨의 사후 제사도 정미수 집안에서 지냈다고 한다. 정순왕후의 묘는 1698년(숙종 24) 노산군이 ‘단종(端宗)’으로, 송씨가 ‘정순왕후’로 추복되면서 묘 또한 ‘능’으로 격상되었다. 그래서 정해진 능호가 ‘사릉’이었다. 단종의 능호는 ‘장릉(莊陵)’이었다. 남양주에는 남양주 광릉과 남양주 사릉 등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사건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유적이 함께 있어 역사적 가치를 더하여 주고 있다.
남양주 홍릉은 대한제국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여흥 민씨의 황릉(皇陵)이다. 고종은 1852년(철종 3) 영조의 현손이었던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철종이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승하하자 익종(翼宗)의 아들로 12세에 즉위하였다. 민씨는 1866년(고종 3) 왕비로 책봉되었고, 1895년 일제의 낭인에 의하여 45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칭제(稱帝)하는 1897년(광무 1)에 ‘명성황후’로 추봉되었다. 남양주 홍릉은 오늘날의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에 있었으나 1919년 고종이 승하한 뒤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황릉이기 때문에 이전 조선의 왕릉과는 달리 명나라 태조의 효릉(孝陵)을 따랐는데, 홍살문 좌측에 판위가 있고 묘도 와주에 석물을 배치하였으며 끝에 정자각 대신 침전(寢殿)을 배치하였다.
남양주 유릉은 순종 황제와 순명효황후 여흥 민씨, 순정효황후 해평 윤씨의 황릉이다. 순종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1874년 태어났다. 1875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1897년 황태자로 다시 책봉되었다. 이후 1907년 즉위하여 연호를 ‘융희(隆熙)’라고 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어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로 남게 되었다. 순종은 1926년 4월 25일 53세로 승하하였고 6월 11일 아버지 고종과 어머니 명성황후의 홍릉 곁에 안장되었다. 순명효황후는 1882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가 1897년 황태자비로 다시 책봉되었는데, 순종의 즉위 이전인 1904년 승하하였다. 그리고 양주 용마산에 묘를 마련하여 유강원(裕康園)이라고 하였는데, 순종 승하 후 남양주 유릉으로 옮겨졌다. 순정효황후는 1906년 황태자비로 책봉되었고, 순종이 즉위한 뒤 황후가 되었다. 창덕궁 낙선재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69년 승하하여 남양주 유릉에 합장되었다.
[남양주시의 원(園)]
경기도 남양주시에는 조선 왕실의 가족 묘인 ‘원(園)’이 많은데 남양주 순강원, 남양주 휘경원, 영원이 대표적이다. 남양주 순강원과 남양주 휘경원은 왕을 낳은 후궁의 묘역이고, 영원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이방자의 묘역이다. 남양주 순강원은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묘이다. 인빈 김씨는 선조의 후궁 중에서 가장 많은 자식을 낳았는데 무려 9남매였다. 셋째 아들이 원종(元宗)으로 추존된 정원군(定遠君)이다. 훗날 인조가 되는 정원군의 첫째 아들 능양군(綾陽君)이 반정을 통해 즉위한 뒤, 아버지를 원종으로 추존하였기 때문에 인빈 김씨의 묘가 '순강원’으로 격상되었다. 인빈 김씨는 본관이 수원(水原)이고 아버지는 사헌부감찰을 지낸 김한우(金漢佑)이다. 묘는 곡장이 둘러져 있고, 봉분은 호석으로 둘러져 있으며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이 있다. 묘표는 장방형의 대석 위에 비신이 있고, 비신 위에는 팔작지붕 형태의 지붕돌로 조성되어 있다. 묘 앞에는 왕릉처럼 정자각이 있고, 신도 끝에는 홍살문 자리가 남아 있으며 원표각(園表閣)과 신도비각(神道碑閣)이 등이 있어 전체적으로 왕릉의 형식을 원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남양주 휘경원은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綏嬪 朴氏)의 묘이다. 수빈 박씨는 순조(純祖)의 어머니였다. 수빈 박씨의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아버지는 좌찬성에 오른 박준원(朴準源)이다. 1787년(정조 11) 정조의 후궁이 되어 순조와 숙선옹주(淑善翁主)를 낳았다. 1822년(순조 22) 사망하였는데, 궁호(宮號)는 가순궁(嘉順宮)이다. 원래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 배봉산 자락에 묘가 조성되었으나, 1863년 현재 위치인 진접읍 부평리로 이장되었다. 남양주 휘경원도 봉분 주위에 곡장이 조성되어 있고, 석호와 석양, 상석과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 석마 등이 봉분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봉분 앞에는 정자각과 신도의 끝에는 홍살문 등이 조성되어 남양주 순강원과 비슷한 규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원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李垠)과 부인 이방자의 묘이다.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다. 영친왕은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비 엄씨(貴妃 嚴氏)이다. 영친왕의 정식 이름은 ‘영왕’이고, 순종 황제와는 이복형제이다. 1900년 영왕으로 봉해졌다가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12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하여 유학을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대한제국이 망한 뒤에 왕세제로 강등되었고 1920년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출신 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일본에 머물렀고, 1963년 귀국하였다가 1970년 사망하였다. 묘역은 봉분 주위에 곡장이 둘러져 있고, 석물이 조성되어 있다. 남양주 홍유릉 권역과 함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남양주시의 후궁묘]
경기도 남양주시에는 남양주 순강원과 남양주 휘경원보다 한 단계 격이 낮은 후궁들의 묘도 있다. 태종의 후궁 신빈 신씨의 신빈신씨묘역을 비롯하여 선조의 후궁으로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 김씨의 남양주 성묘(南楊州 成墓), 선조의 후궁 순빈 김씨의 묘역,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의 남양주 안빈묘,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의 남양주 영빈묘이다.
신빈 신씨는 태종의 후궁으로 총애를 받았고 함녕군(諴寧君)과 온녕군(溫寧君), 정신옹주(貞信翁主), 정정옹주(貞靜翁主), 숙정옹주(淑貞翁主), 숙녕옹주(淑寧翁主), 숙경옹주(淑慶翁主), 숙근옹주(淑謹翁主)를 낳았다. 신빈신씨묘역은 와부읍 도곡리 산41번지에 있다. 묘역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봉분이 팔각 형태의 호석으로 둘러져 있는 특징이 있다. 묘표는 고려 말기 양식의 연화형으로 조성되어 있다.
남양주 성묘는 선조의 후궁으로 임해군(臨海君)과 광해군을 낳은 공빈 김씨의 묘이다. 진건읍 송능리 312-8번지에 있으며 199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남양주 성묘는 여타 후궁 및 남양주 순강원(順康園) 등의 묘와 다르게 거대한 규모의 석물이 조성되어 있다. 문인석과 무인석, 석마가 각각 한 쌍씩 배치되었고, 곡장과 난간석, 석호 등이 왕릉의 규모를 보이고 있다. 공빈 김씨의 아들 광해군이 재위 당시 친어머니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였기 때문이다. 남양주 성묘의 석물들은 광해군 재위 당시 공빈의 묘가 ‘성릉(成陵)’으로 격상되었을 때 조각된 것들이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성릉은 ‘남양주 성묘’로 격하되었고, 공성왕후 역시 후궁의 지위인 ‘공빈’으로 강등되었다.
순빈 김씨는 선조의 후궁으로 슬하에 순화군(順和君)을 두었다. 묘소는 별내동 산201-1번지에 있으면 바로 옆에 순화군묘가 있다. 봉분은 호석이 둘러져 있으며 묘표 없이 받치는 대석이 있고, 대석 앞에는 상석과 혼유석이 있다. 다른 후궁들 묘에 비하면 석물이 많지 않다.
안빈 이씨는 효종의 후궁으로 숙녕옹주(淑寧翁主)를 낳았다.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심양(瀋陽)으로 인질로 끌려갔을 때 따라갔다가 1645년 귀국하였다. 후궁으로서는 효종과의 사이에서 유일하게 자녀를 두었던 인물이다. 효종의 손자인 숙종이 '안빈'으로 봉해 주었다. 묘역은 진건면 송능리 471-1번지에 있다. 봉분 주위에 곡장이 둘러져 있고, 묘표가 세워져 있는데, 묘표의 글씨는 사위인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이 쓴 것이다. 봉분에 호석은 없고, 망주석과 동자석, 문인석 한 쌍 등이 조성되어 있다. 199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영빈 김씨는 숙종의 후궁으로 본관이 안동(安東)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현손이고 아버지는 김창국(金昌國)이다. 숙종이 왕비와의 사이에 자녀가 없자 특별히 간택되어 입궁한 후궁이다. 영빈의 가문은 당시 서인 노론이었는데, 같은 당색의 인현왕후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폐위되자 영빈 또한 궁에서 내쳐졌다.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淑嬪 崔氏)가 낳은 연잉군[후일 영조]의 양어머니가 되어 영조를 길렀다고 한다. 그리하여 영조는 영빈이 사망하였을 때 자신이 “항상 어머니라고 불렀다.”라고 술회하기도 하였다. 묘역은 진접읍 장현리 175번지에 있으며 199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안빈 이씨의 묘처럼 봉분에 호석은 없지만 곡장과 묘표, 문인석과 장명등이 조성되어 있다.
[남양주시에 있는 대원군들의 묘]
덕흥대원군은 선조의 친아버지이다. 덕흥대원군은 중종(中宗)과 창빈 안씨(昌嬪 安氏)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9세 때 덕흥군에 봉해졌는데, 1567년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이 즉위한 뒤 1569년에 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 부인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하동 정씨(河東 鄭氏)이다. 세조의 공신(功臣) 정인지(鄭麟趾)의 증손녀로 아버지는 정세호(鄭世虎)이다. 묘역은 별내동 산205-13번지에 있다. 덕흥대원군과 부인이 쌍봉으로 있고, 호석이 둘러져 있다. 귀부(龜趺)가 바치고 있는 대리석의 신도비(神道碑)가 조성되어 있다. 지붕돌은 팔작지붕 형태이다. 비문은 영의정을 지낸 홍섬(洪暹)이 지었고, 글씨는 중종의 부마로 명필이었던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이 썼다. 묘역 아래에는 선조의 큰형 하원군(河原君) 이정(李鋥)의 묘도 조성되어 있어 부근이 전주 이씨 덕흥대원군파 묘역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덕흥대원군묘는 1980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덕릉(德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흥원(흥선대원왕)은 고종 황제의 친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묘이다. 흥선대원군은 1843년(헌종 9) ‘흥선군’에 봉해졌다.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신정왕후(神貞王后) 풍양 조씨(豐壤 趙氏)에 의하여 자신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하응은 대원군이 되었다. 이후 1907년(융희 1) 순종이 즉위하자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묘역의 제도는 조선 왕조의 능원제를 따랐다고 하나 상당히 간략하다. 봉분은 곡장으로 둘러져 있으며 봉분에는 호석이 조성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 앞에 귀부의 받침에 오석(烏石)으로 만든 비신, 팔작지붕 형태의 지붕돌로 구성되어 있다. 1927년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김학진(金鶴鎭)이 짓고 전자(篆字)를 썼으며, 비문의 글씨는 이재극(李載克)이 썼다. 흥선대원군의 묘는 원래 1898년 경기도 고양군에 조성되었는데, 1906년 파주로 이장되었다가 1966년 현재의 자리인 화도읍 창현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1978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