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1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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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 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홍민호 |
[정의]
918년부터 1392년까지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일대에 해당하는 풍양현의 내력.
[개설]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지역은 고려 시대 풍양현(豊壤縣) 일대에 해당한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에 따르면 풍양궁 터가 곧 풍양현의 옛 읍치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풍양궁지가 소재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일원이 고려 시대 현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해당 지역은 본래 고구려의 골의노현(骨衣奴縣), 신라의 황양현(荒壤縣)인데, 고려 초에 풍양현이 되었다. 1018년(현종 9) 군현의 내속 관계를 조정할 때 양주(楊州)에 그대로 속하게 했다[仍屬] 하였으므로, 현종 대 이전부터 양주와 관련성을 보였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후에 현재 경기도 포천시 일원에 해당하는 포주(抱州) 소속으로 조정되어, 현재 남양주시 영역은 고려 시대 대부분 포주의 속현으로 존재하였다. 포주와 직접적인 주현-속현관계가 설정됨으로써, 조세의 납부 등에서 풍양현은 포주의 간여를 받았다.
한편, 고려 시대에는 경(京)·목(牧)·도호부(都護府) 등 상위 읍격에 계수관(界首官)을 설정하여 일종의 상급 지방행정 기구로서 상대적으로 광역의 행정을 관할하였다. 포주를 관할하던 계수관 고을은 양주였기에, 풍양현의 물자 운용이나 수취는 풍양현-포주-양주[후의 남경]-개경으로 이어지는 계선에서 관리되었다. 계수관 고을에서 향공(鄕貢)을 선상(選上)하였으므로, 풍양현에서 계수관시에 응시하려는 자가 있다면 양주로 이동하여 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계수관은 주변 고을의 죄수를 추검(推檢)하였으므로, 풍양현의 옥사도 양주의 간여를 받았다. 따라서 고려의 지방 행정 구조상으로 볼 때 현재의 남양주시 일원, 풍양현은 포주뿐 아니라 양주와도 관련성을 보였던 군현이었다.
[고려 시대 풍양현의 교통상의 역할]
고려 시대의 풍양현은 상수역(桑樹驛)이 위치하고 있어 교통상으로도 일정 역할을 하는 지역이었다. 개경으로부터 남쪽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 주요한 대로는 임진도(臨津渡)[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위치]를 건너는 것과 장단도(長湍渡)[현재 경기도 장단군 위치]를 건너는 것 등 두 갈래였다. 이 중 장단도로(長湍渡路)는 개경에서 송림(松林)[현재 황해북도 장풍군 일원]-장단(長湍)[현재 황해북도 장풍군 일원]-적성(積城)[현재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일원]-견주(見州)[현재 경기도 양주시 일원]를 지나 양주[남경]로 이어지는 노선이었다. 이 가운데 풍양현의 역로는 견주 및 양주와 통해 있어, 장단도로의 보조 노선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개경에서는 송림-장단-적성-사천(沙川)[현재 경기도 동두천시 일원]-포주-가평(嘉平)[현재 경기도 가평군 일원]-춘주(春州)[현재 경기도 춘천시 일원]를 통해 고려 동측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남경에서 역시 가평-춘주를 거쳐 고려 동편으로 길이 나 있었다. 풍양현은 포주-조종(朝宗)[현재 경기도 가평군 일원]을 지나 가평으로 합류할 수 있는 역로가 있었다. 따라서 고려 동편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보조 노선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여진다.
[고려 시대 격전지로서 풍양현]
이러한 교통의 여건은 군의 기동에 활용되었기에 전쟁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직접적인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1217년(고종 4) 거란유종(契丹遺種) 금산왕자(金山王子) 군과의 전투이다. 1216년 거란군은 황주(黃州)[현재 황해북도 황주군 일원]에 이른 이후, 우봉(牛峯)[현재 황해북도 금천군 일원]-임진-장단-적성을 거쳐 남하하면서도 동주(東州)[현재 경기도 철원군 일원]를 점령하여 우회로도 확보하였다. 이후 풍양현의 효성고개[曉星峴]에 도착하였고 횡탄(橫灘)을 건너는 고려군을 공격하였다. 당시 보고에는 좌군은 패퇴하였으나 중군과 후군이 적을 격퇴한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화살에 맞고 귀환한 대정(隊正) 안팽조(安彭祖)는 “거란군은 단 2인만 피살되었고 남은 전사자는 모두 아군이다.”라고 증언하였다. 전황에 대한 보고가 엇갈리나, 풍양현 일대가 당시 격전지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그 외에도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고려 전역이 전장터였던 몽골과의 전쟁 시에도 고려 경내에 진입한 몽골군은 주로 한강을 도하하여 광주(廣州)[현재 경기도 광주시 일원]를 지나 남하하였으므로, 한강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풍양현 역시 피해가 극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풍양현 일원의 토성]
풍양현 일원의 토성으로는 조씨(趙氏)가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단계부터 전하며,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해당 지역의 명족(名族)으로 나타난다. 고려 시대에도 풍양 조씨는 일정 정도 명맥을 유지했다. 풍양 조씨의 시조 조맹(趙孟)[?~?]은 태조 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었고, 조맹의 후손 조운흘(趙云仡)[1332~1404]은 홍건적의 침입 당시 국왕을 호종한 공으로 1363년(공민왕 12) 2등 공신에 제수되기도 했다. 풍양현의 경관과 관련한 일화로는 풍양현 지역에서 무릉도원을 노래했던 문인 이인로(李仁老)[1152~1220]의 시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