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4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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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臨海君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52-1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민규 |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574년 - 이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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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609년 - 이진 사망 |
조성 시기/일시 | 1609년 - 임해군묘 조성 |
이장 시기/일시 | 1623년 - 임해군묘 이장 |
현 소재지 | 임해군묘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52-14 |
성격 | 묘 |
관련 인물 | 임해군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있는 조선 선조의 아들 임해군 이진의 묘.
[개설]
임해군묘(臨海君墓)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있는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1574~1609]의 묘이다. 임해군 이진은 조선 제14대 선조(宣祖)의 큰아들이자 광해군(光海君)의 친형으로 어머니는 공빈 김씨(恭嬪 金氏)이다. 임해군은 1585년 허명(許銘)의 딸 양천 허씨(陽川 許氏)[1571~1644]와 혼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명으로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기 위하여 순화군(順和君)[1580~1607]과 함께 함경도로 떠났지만, 국경인(鞠景仁)[?~1592] 등이 반역하여 포로가 되었다. 임해군과 순화군 등은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겨져 부산까지 이송되었으며, 여러 차례 석방 협상 끝에 서울로 돌아왔다.
임해군은 선조의 첫째 왕자였기 때문에 세자(世子)에 책봉되었어야 하지만 동생 광해군이 임진왜란 중 세자가 되었으며, 이후 임해군은 포로로 있었던 정신적 압박 등으로 포악함이 심해졌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명(明)에서 임해군과 광해군의 세자 책봉 문제를 조사하자 조사를 피하여 광해군은 임해군을 진도(珍島)에 유배하고, 다시 강화 교동(喬洞)으로 옮겼다. 임해군은 1609년 살해당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임해군은 복관(復官)되었으며, 경창군(慶昌君)의 아들 이경(李儆)을 양녕군(陽寧君)에 봉하여 임해군의 후사로 삼았다. 1871년 임해군에게 정민(貞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위치]
임해군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52-14번지에 있다. 임해군묘 남쪽 400m 거리에 어머니 공빈 김씨의 성묘(成墓), 남서쪽 900m 거리에 광해군묘가 있다.
[변천]
임해군묘는 원래 수원(水原) 광교산(光敎山)에 조성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임해군이 복관작되자, 윤10월 10일에 양주(楊州) 천마산(天磨山) 적성동(赤城洞)[현 진건읍 송능리]으로 이장하였다. 인조는 임해군의 이장에 석회(石灰) 300석을 내리고 상여(喪輿), 역군(役軍)을 경기감사로 하여금 제공하게 하였다. 1644년 임해군 부인 양천 허씨가 사망하자 조묘군(造墓軍) 200명을 보내기도 하였다.
[형태]
임해군묘는 임해군과 부인 양천 허씨가 합장된 단분(單墳)이며, 원형의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이 건립되어 있으며, 묘표는 현대에 새로 건립한 것이다. 묘 아래에서 17세기 장명등 체석(體石)과 개석(蓋石)이 발견되었는데 임해군묘 장명등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