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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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眉壽 |
이칭/별칭 | 기수(耆叟),우재(愚齋),소평(昭平)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신채용 |
출생 시기/일시 | 1456년 - 정미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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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04년 - 정미수 금부당상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512년 4월 16일 - 정미수 사망 |
출생지 | 광주 - 전라남도 광주광역시 |
묘소|단소 | 정미수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사능리 산62]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해주(海州)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정미수(鄭眉壽)[1456~1512]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기수(耆叟), 호는 우재(愚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대제학과 좌의정을 지낸 정역(鄭易)으로 태종과 동방급제한 사이였다. 증조할머니는 권사종(權嗣宗)의 딸 안동 권씨이다. 할아버지는 형조참판 정충경(鄭忠敬), 할머니는 민호덕(閔好德)의 딸 여흥 민씨(驪興 閔氏)이다. 아버지는 문종 부마인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 어머니는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이다. 부인은 판서 이덕량(李德良)의 딸 전의 이씨(全義 李氏)이다. 고모부가 세종의 여덟째 아들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이다. 정미수는 부인과의 사이에 자녀가 없어 칠촌 조카 정승휴(鄭承休)를 양자로 들였다.
[활동 사항]
정미수는 1456년(세조 2)에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 영양위 정종이 역모 혐의를 받아 전라도 광주에 안치되어 어머니 경혜공주가 광주로 내려갔는데, 광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461년(세조 7) 전라도관찰사 함우지가 정미수의 아버지 정종이 승려들과 결탁하고 있다는 장계를 올려 한성으로 압송된 뒤 1461년 10월 20일 군기시 앞에서 능지에 처해졌다. 이후 어머니 경혜공주가 한성으로 올라오게 되었고, 세조는 아들에게 ‘미수’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당시 정미수는 일곱 살이었다. 이후 경혜공주는 정미수의 나이 16세 때인 1473년(성종 4) 3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미수는 일곱 살 이후부터 세조의 손자로 훗날 성종이 되는 자을산군을 모시며 살게 되었는데, 성종의 승하 후에는 연산군의 아들 양평군(陽平君) 이성(李誠)을 양육하면서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미수는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계유정난(癸酉靖難)과 세조 찬탈 및 아버지 정종을 죽게 했던 한명회 등이 부관참시되었을 때 금부당상으로서 처벌을 맡았다. 이후 정미수는 중종반정 ‘정국공신(靖國功臣)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이 되었고, 1512년(중종 7) 4월 16일 57세로 사망하였다.
[묘소]
정미수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 산62에 있는데, 단종 비 정순왕후가 안장된 사릉의 경내에 위치해 있다.